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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겨우 겨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30.

최금진 시인 / 유령들

 

 

    여기 외투와 속옷까지 모두 빼앗긴 사람이 있다.

    지나는 자들을 붙잡고 집엘 데려다 달라고 흐느끼는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우리의 약한 시력을 탓하며

    그것을 농담하였다, 유령이 나타났다.

     

    어디까지가 사람인가의 문제는

    얼마나 유용한가의 문제였므로

    유령에 대해 나름 일가견이 있는 식자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이른 바 난제였다.

     

    이 새로운 종의 등장은 얼마간 우리의 관심이었다.

    공중에서 한 손가락이 나타나

    여기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명령하기 전까지

     

    없는 입,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물으며

    지금 세계는 형체조차 사라진 유령들이

    잃어버린 제 옷과 몸을 찾으러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문 열어주면

    당신의 옷을 걸치고 앉아

    밥 좀 달라고, 너무 굶었다고

    흐물흐물 녹아내린 눈알로 하소연할 것이다.

     

    대낮에, 광장에 유령이 출몰한다.

     

    죽을 수도 없고 죽이지도 못하는

    최악의 밑바닥에서 그것들이 이쪽으로 기어올라온다.

 

계간 『모든: 시』 2018년 가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노루

 

 

    겨울 산을 넘어가 한 마리 노루가 되었다네.

    차마 식물인간이 되지 못해 병실에서 탈출해 온

    의료비 미납 환자처럼 노루들이 생긋생긋 웃더군.

    방금 눈발이 전달한 나의 부고 소식을

    잎으로 틔워내기 위해 노루는

    머리에 나뭇가지를 꽂고 있었지.

    굽은 손가락 관절들이 머리에 화관처럼 돋았더군.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생에서

    과연 얼마나 많이 달아나야 사람을 벗을 수 있는지.

    기계공이었던 사람, 농부였던 사람, 백수였던 사람

    죄인이었던 사람, 아버지였던 사람도

    밤이면 짐승처럼 웅크리고 누워 잠드는데

    눈보라 속에는 노루들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의젓하게 눈발을 응시하더군.

     

    눈이 발등까지 덮이고 소로도 지워지고

    내 눈동자에 한 점 눈송이가 켜질 때

    누군가 툭툭 주둥이로 등을 치받으며 말하더군.

    가세, 무리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사람의 말을 모르는 두 귀와 사람의 생각을 잊은 얼굴들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

     

    어제의 메모와 기도들을 발굽으로 문질러 지우고

    어스름을 뚫고 사람들이

    일렬로 산등성이를 지나가고 있었지.

    골짜기에 아주 오래 메아리가 울리고

    노루들은 훨훨 날아올라 달 속으로 날아가

    모두 노루가 되고

    나도 겨울 산으로 가서 한 마리 노루가 되었다네.

    더운 김을 뿜으며 달덩이를 새김질하고 있었네.

     

    무크지 『포에트리 슬램』 2018년 통권 제3호 발표

 

 


 

 

최금진 시인 / 악기가 돌아왔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며 악기가 돌아왔다.

    내 발밑에 머리를 대고 누워 낑, 끼잉, 울었다.

    제 몸통을 잇는 줄 끊어진

    망가진 현악기였다.

    울림통으로 쓰던 곳엔 피 흥건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얘야, 미안하다, 나는 절망도 노래로 이해했었구나.

    털 뽑힌 자리 훤한 악기를 쓰다듬어 본다.

    저녁의 나무들과 흐릿한 창문들이

    귀 접고 꼬리 내리고 돌아오는 길짐승 같구나.

    상처를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는

    슬며시 네 입에 음계를 재갈처럼 물려

    자, 노래하고 춤을 추어보렴, 그토록

    잔인하게 박수를 쳤구나.

    현이 끊어진 채

    발밑에 쓰러져 누운 이 작고 볼품없는 악기는

    낑, 끼잉, 제 몸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소리를 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디 자신을 혐오해 달라고, 이제 그만 놓아 달라고

 

계간 『문학의 오늘』 2018년 여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겨우 겨울

 

 

거울의 희고 시커먼 얼굴이 좋았다.

선친께선 자주 거울을 통해 영계를 다녀오신 모양.

거울이 모친을 불러 묻기를, 어째서 방이 이렇게 식도록 두었냐고

 

손거울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버릇 때문에

나는 종종 버림받는 여자가 되기도 했거니와

주로 뭔가를 잃거나 패배했을 때였다.

 

겨울 들판을 넘어가는 그 사내를 만난 것도 거울 속이었다.

뻥 뚫린 그의 얼굴 속으로 눈보라가 지나가고 있었다.

얼음 언 호수 밑바닥엔 흰 수염 자란 물고기들이

물에 빠져 죽은 여자가 깨지 않도록 돌보고 있었다.

사내가 전나무 아래 눈더미처럼 풀썩 쏟아졌다.

 

집에 거울을 들인 죄로 나는 거울이 되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을 모두 거울 밖으로 풀어 놓고나니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어제 이사를 하였다.

바다가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곳을 걸어보면

금세 섬 한 바퀴가 완성되었다.

거울이 한 사내를 들여다보며 오래 앓았던 흔적.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언덕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곳까지 나는 걸어가 보았다.

어떤 길도 나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길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겨우, 겨울이었다.

 

계간 『시와 세계』 2018년 가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말과 함께

 

 

    죽은 말의 뼈다귀를 보았네.

    건초를 씹어 먹던 돌멩이 같은 이빨은 서너 개 붙어 있었네.

    얕은 돌담 너머, 작은 개울이 흐르던 그늘에서

    그것은 마지막 제 고삐를 바닥에 묶고 있었네.

    눈알 빠진 자리엔 먹구름이 뭉쳐져 있었네.

    얼굴 뼈가 너무 길어서 가여워 보였네.

    하얀 얼굴 뼈가 하얗게 웃고 있었네.

    개울가에서 내장과 똥이 씻겨진 다음

    추렴한 사람들의 양동이와 비닐팩에 담겨진 채

    터벅터벅 어두운 들판을 뼈다귀가 되어

    걸어가 본 적 있느냐고 턱뼈가 묻고 있었네.

    말의 부서진 얼굴을 주워 쓰고 노파들이 지나갔네.

    마구를 맨 노예처럼 나무들이 제 몸을 저녁 속으로 내몰고 있었네.

    앞발을 높이 들어 푸르륵거리면서 잡목들이 일어섰네.

    꼬리로 제 몸과 엉덩짝을 힘껏 채찍질하면서

    가다가 또 돌아보고 하면서 바람이 더운 숨을 몰아쉬었네.

    개울가에, 풀숲에, 찔레꽃이 힘겹게 가시를 내쏘는  그 그늘에

    하얀 말 뼈다귀 한 채가 엎드려 몸을 풀어놓고 있었네.

    멀리서 말 모는 사람들의 휘파람 소리 들리고

    돌담들이 달그락거리며 뼈를 맞추는 소리.

    허리에 짐을 인 노파들이 삐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사람 없는 집들이 빈 안장처럼 들판에 놓일 때

    작은 들꽃 몇 개가 말의 늑골에서 등불처럼 켜지고 있었네.

    죽은 말의 뼈다귀가 죽은 말과 함께 누워 있었네.

 

계간 『삶이 보이는 창』 2018년 가을호 발표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쳔년의시작, 2014)이 있음. 현재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