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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림 시인 / 바닥경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

박해림 시인 / 바닥경전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푹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리는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집 『바닥경전』(나무아래서, 2012) 중에서

 

 


 

 

박해림 시인 / 적막

 

 

  마냥

  웃고 싶은 때

  벙그는 게 꽃인 줄 알았다

  혼자

  저물고 있을 때

  꽃도 그러는 줄 알았다

  후루루, 바람 진자리

  돋아나는 붉은 혀

 

  혹여 생각날까,

  시신경이 눌릴 때

  막힌 눈물샘 하나

  마르지 않는 젖줄 하나

  겨울산

  환한 적막이 침묵인 줄 몰랐다

 

  말랑말랑한 이 봄이

  눈 아프게 지고 있는

  오늘은

  어제의 그 날, 또… 또… 그 날…

  얼룩진

  저 꽃핀 자리,

  툭툭 떨어져 눕는 오후

 

계간 『문학·선』 2008년 봄호 발표

 

 


 

박해림 시인

부산에서 출생.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석사)졸업. 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졸업. 1996년 《시와시학》 여름호에〈우리가 그곳에서 만난다면〉 외 5편으로 시부문 신인상에 당선. 1999년 《월간문학》 동시부문 신인상에 당선. 2002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 시집으로『실밥을 뜯으며』 등과 시조집으로『눈 녹는 마른 숲에』 등이 있음. 2001년 정지용 신인문학상과 2003년 수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