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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시인 / 달에게 부치는 편지
구름 낙엽이 지는 느티나무 밑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지요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 듯이 시월에 숨어든 나 기억 속 희게 빛나는 아버지 고무신이 보이네요 십일 문 삼, 바다에 떠 있는 배같이 큰, 내가 탈 수 없는, 언제나 너무 멀리만 있던 크고도 흰 고무신을 신은 아버지가 달빛 속에 보이네요
아버지는 배를 타고 현실의 바다로 나갔지요 아버지가 만난 어부들은 아버지를 어부로 이해해주던가요 아버지를 따뜻하게 감싸주던가요 아버지, 갈릴리 호수의 베드로를 만나셨나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그리운 사랑을 만나보셨나요
시월 상달의 달빛은 차고도 밝으며 고드름처럼 시리고도 눈이 부십니다 아버지 계신 하늘나라에도 달은 뜨겠지요 아버지, 화선지에 번져드는 먹물인 당신의 달빛 마음을 불러봅니다 칼날보다 날카롭게, 얼음보다 더 차게 모질었던 딸이 눈물을 바다로 흘러 들이게 하며 편지를 씁니다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밤이 배달하는 편지를 달에게 부칩니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08년 봄호 발표
박소영 시인 / 약국 감옥
할머니, 다리가 아파요 나의 발은 종일을 걸어도 제자리입니다
장맛비로 땟국을 씻어낸 하늘이 말간 얼굴을 드러낸 오후, 천사의 날개 빛뭉게구름 그림은 밀레의 어떤 그림보다 보다 더 훌륭하지요. 그 그림 속에는 담장 가에서 자줏빛으로 익은 툭툭 불거진 자두도 보이네요
입안에 침이 고여요
어젯밤 꿈속에서는 유년의 강가에 갔었지요. 금강 상류 칼바위 밑 깊고도 시퍼런 물은 우리 집 머슴이었던 기선이도 못 들어간다고 했지요. 태고정 아래 강변 자갈돌들이 광목을 펼쳐놓은 듯 하얗게 빛을 발하면 달맞이꽃 입 벌리는 소리도 퍽퍽 들렸지요
안망정 산기슭에는 도라지꽃과 참나리가 피어있고 그 아래 원두막에서 수박과 개구리참외를 먹던 생각이 나요. 기러기 雁에다 바랄 望과 뜰 庭이라고 말씀하셨던 생각도 나네요. 雁望庭
이름처럼 참 아름다운 그 곳 할머니, 다리가 아파요
온종일을 걸어도 제자리인 약국에서 다시 할머니를 불러요. 할머니를 그리워하면 용담댐에 묻은 고향도 보여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할머니는 구름이 비켜난 자리에 늘 있지요. 보이기만 하고 만질 수 없는 할머니, 눈을 뜬 채 물의 문을 열고 댐 속으로 들어가면 할머니를 만질 수 있을까? 하지만 죄인이 들어갈 수 없는 천국의 문처럼 굳게 닫힌 물이 열리지 않아요. 물의 낯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는 고향을 마음눈으로만 봐요. 헛바퀴 도는 차륜처럼 언제나 제자리에 서있는 내가
천형의 감옥에서 오늘을 살아요.
계간 『시선』 2009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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