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작음을 깨닫고 모래 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 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한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름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 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이니 내 인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 가나보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古家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님은 가시밭길 헤치고
님이 오신다는 꿈 같은 날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았으련만 웬일로 자꾸만 서러워 온종일 방안에서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더 자꾸 흘러 무지개모양 사라진 꿈은 진정 아니고--- 험한 길 가시덤불을 님은 밟고야 오신다니 꽃자리는 검으리 어디선가 이브의 후예들이 옷을 다듬는 밤 님이 오실 날을 나는 조용히 은하(銀河)가에 그리나니---
노천명 시인 / 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 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 만을 쳐다보며 얘기는 우정 딴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말 않고 그저 가려오
말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내 창을 두드려놓고 무거운 침묵 속에 괴로워 허덕이는 인습의 약한 아들을 내 보건만 생명이 다하는 저 언덕까지 깨지 못할 꿈이라기 나는 못본 체 그저 가려오
호젓한 산길 외롭게 떨며 온 나그네 아늑한 동산에 들어 쉬라 하니 이 몸이 찢겨 피 흐르기로 그 길이 험하다 사양했으리----
"생"의 고적한 거리서 그대 날 불렀건만 내 다리 떨렸음은---- 땅 우의 가시밭도 연옥의 불길도 다 아니었소 말없이 희생될 순한 양 한 마리 ....다만 그것뿐이었소.....
위대한 아픔과 참음이 그늘지는 곳 영원한 생명이 깃들일 수 있나니 그대가 낳아준 푸른 가락 고운 실로 내 꿈길에 수놓아가며 나는 말 않고 그저 가오 못 본체 그냥 가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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