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 시인 / SANATORIUM
옷도 베드도 벽도 창장(窓帳)도 모두 희어 무섭게 깨끗해얄 곳인데두 이 무슨 악착한 병균(病菌) 살기에 이리 외론 곳이냐
저승으로 갈 채비를 하얗게 하였구나 병동(病棟) 유리창에 오후의 햇볕이 따가워 간호부 흔드는 손이 슬프기만 하여라
죽순, 1948. 3
조향 시인 / 쥬노'의 독백
참 우습지 커튼(curtain) 렉처(lecture)는 언제나 복숭아 빛깔인데 선생님들은 어두운 로비에서 케라라의 라라라 그렇지 라오스에서는 무엇을 자꾸 포기한다고 한다 고부랑깅 강아지는 낮 열한 시를 바라보고 한없이 울지 않았다 미인은 바크테리아를 기르는 선수들인데 낭자한 테블 위에는 자빠진 마네킹의 허벅지 네 살난 아들놈이 그 치마 밑으로 손을 넣어 보더니 왜 이러냐고 갸웃이 묻는다 UP는 네루 수상의 찌푸린 표정을 보도하고 죄들이 옥수수처럼 알알이 영글어가면 붉은 발톱이 국경선을 할퀸다 목쉰 영감이 죽으면서 남겨 놓은 기침 소리가 겹쳐진다 기분 나쁜 오브제가 수세미의 모양 조랑조랑 달린 골목길에서 나는 낡은 황제의 모자를 쓰고 있다 석양은 녹색으로 물들어 가는데 영금을 보는 소녀의 외마디 소리 하품을 뱉으니까 트랜지스터 라디오 소리가 나더니 비둘기가 한 마리 어깨에 와서 오후 여섯 시를 구구거린다 셈본 성적이 좋지 않았지 그럼 팔랑고렁거리는 치마 자락은 어젯밤의 검은 빛을 갑자기 회상한다 되씹어 보면 사랑스러운 죄들이 시척지근한 트림과 더불어 꽤 생산될 것이니라 아아멘 자멘호프 박사의 암호 말씀인가요? 순정이 십자가에서 말라 죽었으니 말야 오늘 밤 골고다에서는 축구 시합이 있을 것이다 밤 곁에서 회색 기침 소리가 난다 손바닥에서 네가 수없이 멸해 간다
사상계, 1959. 10
조향 시인 / 가을과 소녀(少女)의 노래
하이얀 양관(洋館) 포오치에 소박한 의자가 하나 앉아 있다
소녀(少女)는 의자 위에서 지치어 버려 낙엽빛 팡세를 사린다 나비처럼 가느닿게 숨쉬는 슬픔과 함께……
바람이 오면 빨간 담장이 잎 잎새마다가 흐느낀다 영혼들의 한숨의 코오러스!
시집(詩集)의 쪽빛 타이틀에는 화석(化石)이 된 뉴우드가 뒤척이고,
사내는 해쓱한 테류우젼인 양 커어텐을 비꼬아 쥐면서 납덩이로 가라앉은 바다의 빛을 핥는다
먼 기억의 스크린처럼 그리워지는 황혼이 소녀(少女)의 살결에 배어들 무렵
가을은 대리석(大理石)의 체온을 기르고 있었다.
문예, 195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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