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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마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6.

박남수 시인 / 마을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 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남수 시인 / 하관(下官)

 

 

무덤을 파고

너는 관 속에 누워 있다.

둘레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통하며 관 위에 꽃을 던진다.

흙도 뿌린다.

눈썹에 가리인 눈물을 통하여,

나는 너의 모습을 지우고 있다.

맑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눈물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었다.

누구의 만남도, 결국은

이렇게 갈리기 위하여 있었겠지만,

눈물의 투명을 통하여

자꾸 흔들어 지우면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다.

흙을 덮고 나면 그뿐, 저 넓은

품에서 너를

다시 찾기는 어려우리라.

안녕, 안녕.

 

 


 

 

박남수 시인 / 훈련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시집 <그리고 그 이후> 1933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2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