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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눈물의 해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6.

임화 시인 / 눈물의 해협

 

 

아기야, 너는 자장가도 없이 혼곤히 잔다.

너는 인제서야 잠이 들었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보채어,

좁은 목이 칼칼하니 쉬었다.

 

너는 오늘밤

이 해협 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의 단 한 가지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잔다.

 

바람이 지금 바다 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결이 갑판 위에서 무엇을 쓸어가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 밑의 어족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이따금,

동그란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녕 주검의 깊은 그림자인 것도 너는 모른다.

 

아마 우리를 실은 큰 배가,

수평선 아래로 영원히 가라앉는 비창한 통곡의 순간이 온다 해도,

너의 고운 잠은 깨이지 않으리라.

 

아기야, 너는 오늘밤,

이 바다 위에 기적의 손길이 미쳐 있는 줄 아느냐?

 

눈물이 흐른다.

현해탄 넓은 바다 위

지금 젖꼭지를 물고 누워

뒹굴을 듯 흔들리는 네 두 볼 위에,

하염없이 눈물만이 흐른다.

 

아기야, 네 젊은 어머니의 눈물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줄 아느냐?

한 방울 눈물 속엔

일찍이 네가 알고 보지 못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자라난 요람의 옛 노래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뜯던 봄나물과 꽃의 맑은 향기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꿈꾸던 청춘의 공상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갈아 붙인 땅의 흙내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어루만지던 푸른 보리밭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안아 보던 누른 볏단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걸어가던 촌(村) 눈길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나무를 베던 산의 그윽한 냄새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죽이던 도야지의 비명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듣던 외방 욕설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받았던 집행 표지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작별한 멀리 간 동기의 추억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떠나 온 고향의 매운 정경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이따금 생각했던 다툼의 뜨거운 불길도 있다.

 

참말로 한 방울 눈물 속은 이 모든 것이 들어 있기엔 너무나 좁다.

그러므로 눈물은 떨어지면 이내 물처럼 흘러가지 않느냐?

나의 아기야, 그래도 이 속엔 아직 그들의 탄 배의 이름도 닿을 항구의 이름도 없고,

이 바다를 건너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조금도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바람과 파도와 그 밖에 온갖 악천후에 대하여,

눈물은 다만 하염없을 따름이다.

 

밝은 날 아침 다행히 물결과 바람이 자서

우리의 배가 어느 항구에 들어간대도 이내 새 운명이 까마귀처럼 소리칠 게다.

나는 그 고이한 소리가 열어 놓는 너의 소년과 청춘의 긴 시절을 생각한다.

아기야, 해협의 밤은 너무나 두려웁다.

 

우리들이 탄 큰 배를 잡아 흔드는 것은 과연 바람이냐? 물결이냐?

아! 그것은 현해탄이란 바다의 이상한 운명이 아니냐?

너와 나는 한 줄에 묶여 나무토막처럼 이 바다 위를 떠 가고 있다.

 

아기야, 너는 어찌 이 바다를 헤어 가려느냐?

날씨는 사납고,

아직 너는 어리고,

어버이들은 이미 기운을 잃고,

내 손은 너무 희고 가늘고,

기적이란 오늘날까지 있어 본 일이 없고,

그러나, 아끼는 나의 아기야.

오늘밤 이 바다 위에 흐르는 눈물이,

내일 너의 젊은 가슴 속에 피워 놓을 한 떨기 붉은 장미의 이름을

아아! 나의 아기야, 나는 안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다시 네거리에서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네거리 복판엔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텁―주의(注意)―꼬―

사람, 차, 동물이 똑 기예[敎鍊] 배우듯 한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구나.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장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오,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보였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미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우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픔과 검은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 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듣고 멀리 문 밖으로 돌아가겠지.

 

오오 정다웁고 그리운 고향의 거리여!

너는 내 귀한 동생 순이와 같이

그가 사랑한 용감한 이 나라 청년과 같이

노하고 즐기고 위하고 싸울 줄 알며 네 위를 덮은 검은 ××을 ×수처럼 ××하던

저 위대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의 발길을 대체 오늘날까지 몇 사람이나 맞고 보냈는가

고향의 거리여……나는 지금

네 우에서 한 사람의 낯익은 얼굴도 찾을 수가 없다.

 

간판이 죽 매어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旗)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던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 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熱한] 발자욱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 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 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林和 , 1908. 10. 13 ~ 1953. 8. 6] 시인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중학교에서 수학. 1927년 《朝鮮之光(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첫 시집 『현해탄』이후 『찬가』 등의 시집과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간행. 카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며 1947년 월북하여 1953년 처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