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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낮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5.

임화 시인 / 낮

 

 

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 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겨우 터를 닦고 재목을 깎던 집들이

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곱게 다린 황라 적삼을 떨쳐 입고,

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밭 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풀러 나무가

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란히 접어 안고,

산 너머 방적 회사의 목멘 고동이

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도 보고,

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졸린 듯 내려앉는다.

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가 보다.

 

후꾼한 바람이 진한 거름내를 풍기며,

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벌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랏빛 꽃수염을

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뜩 싣고 아롱거린다.

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거미줄채를 손에 든 선머슴아이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 텐데,

오 저런 망할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어쩌면……

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빨간 빛깔이 기름칠한 것처럼 윤택 나는 날씬한 체구가

어찌 될지!

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동산은 어른처럼 말없이 잠잠하다.

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 보다.

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 차고,

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오오, 고마와라, 얼마나 고마울까!

문득 나는 이 조그만 꿈을 깨여,

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하고,

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아직 살아 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너 하나 때문에

 

 

오직 있는 것은

광영 하나뿐이고,

정녕 굴욕이란 없는가?

있어도 없는 것인가?

만일 싸움만 없다면……

 

그러나 싸움이 없다면,

둘이 다 없는 것,

싸움이야말로

광영과 굴욕의 어머니,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패배의 피가

승리의 포도주를 빚는 것도,

굴욕이

광영의 향료를 끌어 내는 것도,

모두 다 싸움의 넓은 바다.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없어,

승리가 실컷

제 즐거움의 진주를 떠 내고,

패배(敗北)이 죽도록

제 아픔의 고귀한 값을 알아 내는 곳.

 

회복될 수 없는

굴욕의

―제군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아프고 아픈 상처가,

붉은 피가

장미 떨기처럼 피어나는 곳.

 

아아!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나는 굴욕마저를 사랑한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높은 산 봉우리마다

 

 

밤중이면

짐승들 요란히 울고

낮이래야 이따금 기러기

그 위를 건너가는

산마루

 

우리 모두

한 자루 낫을 갈아

허리에 차고

정정(丁丁)한 소리

나무를 베어 불을 지르면

 

타오르는 불길

걷잡을 수 없어

읍으로 읍으로

고함치며 몰려가던 밤

 

더운 피 흘리며 죽은

동무의 소름끼치는 비명

잠결에도 귀에 쟁쟁하여

아아 원수보다도

잔인한 마음을 지니고

 

농군의 두터운 가슴

골짝마다에 있고

번개처럼 빛나는

인민항쟁대(人民抗爭隊)의 눈이

남조선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있구나

 

찬가, 백양당, 1947

 

 


 

임화 시인 / (1908∼1953) 약력

본명 인식(仁植).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으며,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습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로 등단. 1929년에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사회 정세가 악화되면서 낭만적 경향의 시를 썼으며,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 월북후 미제의 간첩이라

는 죄명으로 1953년 사형을 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1938)과 『찬가』(1947) 평론 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