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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7.

박남수 시인 / 새 1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1959)-

 

 

이 시에서 새는 맑고 깨끗한 순수의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태나 가식이 없는 순수성은 화자가 동경하는 직접적 대상이다. 그러나 포수의 설정으로 새의 본질인 순수성은 위협을 받게 되고 결국 포수가 겨냥한 새의 순수성은 '피에 젖은 한 마리의 새'에 불과한 비순수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수의 출현은 이 작품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가면서 결말로 치닫게 만든다.

 

새의 이미지는 하늘의 이미지에서 땅의 이미지로 즉 상승의 이미지에서 하강의 이미지로 변화되고 새의 천상을 향한 비약은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닐 때 존재 의미를 부여받던 새는 포수와 대립적 관계 속에서 순수성이라는 본질을 상실한 죽음의 새가 되고 만다. 시인과 순수는 결과적으로 단절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시인이 지향한 순수라는 가치는 허상으로 존재한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박남수 시인 / 초롱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조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山)턱 원두막일상한 곳을 지나

믆어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는 초롱불 ......


초롱불, 삼문사, 1940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간신히 불빛이 발하고 있는 초롱불의 이미지는 강렬한 빛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이제 곧 소멸될 것 같은 아주 약한 불빛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불빛은 어두운 밤을 지켜주는 의미로서의 빛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둠에 의해 그 빛을 잃어가는 나약한 이미지로서의 빛일 뿐이다. '별하나 보이지 않는 밤'의 위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초롱불의 이미지는 시각적 의미를 상실하고'풀짚는 소리'인 청각적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박남수 시인 / 밤길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닥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초롱불, 삼문사, 1940

  

위 시의 배경은 한 여름밤의 시골이다. 빗방울이 내리는 밤에 듬성듬성 지키고 있는 등불의 이미지는「초롱불」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멀리 보이는 산턱이라는 거리감 때문에 등불의 존재는 더욱 외롭고 나약한 여린 이미지로 제시되고 이것은 간신히 불빛을 내고 있는 어두운 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홀딱 지나간 번개불'에 어리는 사나이의 모습은 비래는 밤에 끊어진 논둑길을 달려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박남수의 초기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빛의 이미지는 대체로 감각적 이미지로 제시되면서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고독하고 불안한 정조로 일관되는 특성을 보인다.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2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