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도 시인 /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저 황막한 벌판을 희게 덮게 하오.
차디찬 서리의 독배(毒杯)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한 바람 때 없이 지내는 잔 칸질에 피투성이 낙엽이 가득 쌓인 대지의 젖가슴 포-트립 빛의 상처를.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저어 앙상한 앞 산을 고이 덮어 다오.
사해(死骸)의 한지(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錦繡) 의 옷과 청춘의 육체를 다 빼앗기고 한위(寒威)에 쭈그리는 검은 얼굴들.
눈이여! 퍽퍽 내려 다오 태양이 또 그위에 빛나리라.
가슴 아픈 옛 기억을 묻고 보내고 싸늘한 현실을 잊고 성역(聖域)의 새 아침 흰 정토(淨土)위에 내 영혼 쉬이려는 희원(希願) 이오니.
오일도 시인 / 노변(爐邊)의 애가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무 잎 하나도 안 남았겠다.
계절이 조락(凋落), 잎잎마다 새빨간 정열의 피를 마을 아이 다 모여서 무난히 밟겠구나.
시간조차 약속할 수 없는 오오 다의 파종(破種)아 울적의 야공을 이대로 묵수(默守)하려느냐?
구름 끝 열규(熱叫) 하던 기러기의 한줄기 울음도 멀리 사라졌다.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로- 고요한 노변에 홀로 눈 감으니 향수의 안개비 자욱히 앞을 적시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나의 사랑아 너의 유방(乳房)에서 추방된지 이미 오래라.
거친 비바람 먼 사막의 길을 숨가쁘게 허덕이며 내 심장은 찢어졌다. 가슴에 안은 칼 녹스는 그대로 오오 노방(路傍)의 죽음을 어이 함을 것이냐!
말없는 냉희(冷灰) 위에 질서없이 글자를 따라 모두 생각이 떳다---잠겼다---또----떴다----
----앞으로 흰눈이 펄펄 산야(山野)에 내리리라 ----앞으로 해는 또 저무리라.
오일도 시인 /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내 연인이여! 좀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애수의 가을, 가을도 이미 깊었나니.
검은 밤 무너진 옛 성너머로 우수수 북성(北城) 바람이 우리를 덮어 온다.
나비 날개처럼 양상한 네 적삼 얼마나 차냐! 왜 떠느냐? 오오 매 무서워라.
내 연인이여! 좀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조락의 가을. 때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한여름 영화를 자랑하는 나뭇잎도 어느덧 낙엽이 되어 저-성뚝 밑에 홀쩍거린다.
잎사귀 같은 우리 인생 한번 바람이 흩어 가면 어느 강산 또 언제 만나리오.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오렴 한 발자치 그대를 두고도 내 마음 먼 듯해 미치겠노라.
전신의 피란 피 열화같이 가슴에 올라 오오 이 밤 새기 전 나는 타고야 말리니.
깜-한 네 눈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오렴 오는 밤엔 이상하게도 마을 개 하나 짖들 않는다.
어두운 이 성뚝 길을 행여나 누가 걸어오랴 성 위에 한없이 짙어가는 밤-이 한밤은 오직 우리의 전유(專有) 이오니.
네 팔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는 두 청춘, 청춘 아! 제발 길어 다오.
오일도 시인 / 누른 포도잎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일도 시인 / 내 소녀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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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薄紗)의 아지랭이 오늘고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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