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옛날
잃어진 그 옛날이 하도 그리워 무심(無心)히 저녁 하늘 쳐다봅니다. 실낱같은 초순(初旬)달 혼자 돌다가 고요히 꿈결처럼 스러집니다.
실낱같은 초순(初旬)달 하늘 돌다가 고요히 꿈결처럼 스러지길래 잃어진 그 옛날이 못내 그리워 다시금 이 내 맘은 한숨 쉽니다.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김억 시인 / 오다 가다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에니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十里浦口) 산(山)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천리(水路千里)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조선 시단' 창간호(1929.11)수록. 7.5조를 바탕으로 한 민요풍의 정형시. 주제는 옛 정을 그리는 한국인 특유의 인정미. 이 작품은 역시 안서의 다른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시정신이 보이지 않고, 우리말의 리듬에만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김억 시인 / 삼수 갑산(三水甲山)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첩첩에 흰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족도난(蜀道難)이 이 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 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안서는 애수야말로 한국시의 고유한 정조(情調)라 생각했는데. 이 시 역시 민요적 애구가 흐른다. 함경도 벽촌인 삼수 갑산에 가고 싶으나, 거기는 산이 첩첩이 싸여 구름조차 막힌 곳. 새라면 날아서 가 볼 수 잇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하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한다는 뜻이다.
김억 시인 / 비
포구 십 리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의 한나절을 모래알만 울려 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떼도 지차귀가 축축히 젖어 너흘너흘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 리 배를 타면 어디를 가노 남포 사공 이 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안서 시집'(1929.4) 수록. 보슬비 내리는 날의 우수를 읊은 감상적 서정시. 4.5조의 민요조. 주제는 그리움. 이 시의 이미지는 비-눈-물-낭군-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어영도" "남포"는 향토색이 짙은 시어. 음수율에 사로잡혀 "못코" "날아를 들고"라 표현한 것은 큰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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