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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인환 시인 / 열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7.

박인환 시인 / 열차

 

 

   궤도 우에 철(鐵)의 풍경을 질주하면서 그는 야생(野生)한 신시대의 행복을 전개한다.

   ―스티븐 스펜더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력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空閨)한 너의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흘러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춘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운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눈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다도 밝게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남풍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土民)

태양 없는 날에            

너의 사랑이 백인(白人)의 고무원(園)에서           

소형(素馨)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꾸멜신(神)의 영광과 함께 사는안콜왓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분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緯度)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죽은 아포롱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오늘은 3월 열 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女給)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星座)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睡眠)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李箱)이라고.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시인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上東里)에서 출생. 낙원동 입구에서 서점 「마리서사(馬莉書舍)」를 경영. 이때부터 김기림·오장환·김광균(金光均) 등 선배시인들과 알게 되었고, 김수영(金洙瑛)·김경린(金璟麟)·김병욱(金秉旭) 등과 교우관계를 맺음. 1946년 시 「거리」발표. 1947년 시 「남풍」, 산문 「아메리카 시논」을 「신천지」에 발표. 1948년 「마리서사」 경영을 그만 둠.

4월에 동인지 「신시론」창간에 김경린 등과 함께참여. 진명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뿌림. 1956년 작고후 시집 『목마와 숙녀』와 『박인환 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