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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홍사용 시인 / 봄은 가더이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8.

홍사용 시인 / 봄은 가더이다

 

 

봄은 가더이다

 

"거져 믿어라"

봄이나 꽃이나 눈물이나 슬픔이나

온갖 세상(世上)을, 거저나 믿을까?

에라 믿어라, 더구나 믿을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풋사랑을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꽃은 피더니만, 그리고 또 지더이다.

 

님아 님아 울지 말어라

봄은 가고 꽃도 지는데

여기에 시들은 이내 몸을

왜 꼬드겨 울리려 하느냐.

 

님은 웃더니만, 그리고 또 울더이다.

 

울기는 울어도 남 따라 운다는

그 설움인 줄은, 알지 말아라.

그래도 또, 웃지도 못하는 내 간장(肝臟) 이로다.

그러나 어리다, 연정아(軟情兒)의 속이여

 

꽃이 날 위해 피었으랴? 그렇지 않으면

꽃이 날 위해 진다더냐? 그렇지 않으면

핀다고 좋아서 날뛸 인 누구며

진다고 서러워 못 살 인 누군고

 

"시절이 좋다" 떠들어대는

봄나들이 소리도, 을씨년스럽다.

산에 가자 물에 가자

그리고 또 어데로

"봄에 놀아난 호드기 소리를

마디마디 꺾지를 마소

잡아뜯어라, 시원치 않은 꽃가지"

들 바구니 나물꾼 소리도

눈물은 그것도 눈물이더라.

 

바람이 소리 없이 지나갈 때는

우리도 자취 없이 만날 때였다.

청(請)치도 않는, 너털웃음을

누구는 일부러 웃더라마는

내가 어리석어 말도 못할 제

휠휠 벗어버리는, 분홍(粉紅) 치마는

"봄바람이 몹시 분다" 핑계이더라.

 

이게 사랑인가 꿈인가

꿈이 아니면 사랑이리라.

사랑도 꿈도 아니면, 아지랑이인가요.

허물어진 돌무더기에, 아지랑이인 게지요.

그것도 아니라, 내가 속았음이로다.

 

동무야, 비웃지 마라

아차, 꺾어서 시들었다고

내가 차마, 꺾기야 하였으랴만

어여쁜 그 꽃을, 아끼어 준들

흉보지 마라, 꽃이나 나를

안타까운 가슴에, 부여안았지

 

그러나 그는, 꺾지 않아도

저절로 스러지는 제 버릇이라네.

아­그런들 그 꽃이 차마

차마, 졌기야 하였으랴만

무디인 내 눈에 눈물이 어리어

아마도, 아니 보이던 게로다.

아­그러나,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白潮』 2호, 1922년 5월)

 

 


 

 

홍사용 시인 / 희게 하얗게

 

 

누이가 일없이 날더라 말하기를

"나의 얼굴이 어찌해 흰지 오빠가 그것을 아시겠습니까?"

"아마 너의 얼굴이 근본부터 어여쁜 까닭이지"

"아니지요! 달님의 흰 웃음을 받았음이지요."

 

"나 사는 이 땅이 흼은 어쩐 일인지 오빠가 아십니까?"

"아마 하얀 눈이 오실 때에 우리의 마음도 희였든 까닭이지."

"아니지요! 가만히 계셔요 나의 노래를 들어 보셔요."

"옷 짓는 시악시를 만나보거든

붉은 꽃 수놓은 비단일랑 탐치 말라고

붉은 꽃 피우라는 사랑이 올 때에

젊은이의 붉은 시름 지지 않을 터이니"

나는 누이의 뜻을 잘 알았다. 그가 나의 옷을 지을 때에

일부러 흰 가음으로 고르는 줄을.

 

(『東明』 17호, 1922년 12월)

 

 


 

 

홍사용 시인 / 바람이 불어요!

 

 

밤이 오더니만 바람이 불어요.

바람은 부는데 친구여 평안하뇨?

창 밖에 우는 소리 묻노라 무슨 까닭

집 찾는 나그네 갈 길이 어드멘고

이 밤이 이 밤이 구슬픈 이 밤이

커다란 빈집에 과부가 울 때라

 

부러진 칼로 싸우던 군사야

잊지 말어라. 차든가 덥든가

주막집 시악시 부어 주는 술이

해 저문 강가에 팔장낀 사공이

애타는 젊은이 일 넌지시 묻거든

그리 말하소 더부살이 허튼 주정 말도 말라고

 

누구의 말이든가 "정성만 지극하면은

죽었던 낭군도 살아오느니라." 고

그것도 나는 믿지 않아요. 거짓말이어서

"꺼진 불을 살리어 주소서" 정성껏 빌어도

북두칠성 앵돌아졌으니 어이 하리요

 

이 밤을 새우면 내 나이 스물네 살!

어머니! 말어 주셔요. 시왕전(十王殿)에 축원을

 

문 앞에 가시성(城)이 불이 붙어요.

당신의 외독자(獨子) 나도 가기는 갑니다

 

죽음의 흑방(黑房)에서 선지피를 끓이어

죄악의 부적을 일없이 그리는

마법사야! 오너라. 네 어찌하리요.

내가 모르는 체 너털웃음을 웃으면은

 

아! 지겨운 밤이 바람을 데려오더니

시들지 않은 문풍지 또다시 우노라.

 

(『東明』 17호, 1922년 12월)

 

 


 

홍사용 시인[洪思容, 1900.5.17~1947.1.7]

1900년 수원(水原: 현재의 화성시)에서 출생. 호는 호는 노작(露雀).  휘문의숙(徽文義塾) 졸업.1922년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참여하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었고 희곡도 썼음.

시·수필·희곡 등 발표 작품은 많지만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은  없고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 2002년 노작문학상이 제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