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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신년사(新年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7.

조병화 시인 / 신년사(新年詩)

 

 

흰 구름 뜨고

바람 부는

맑은 겨울 찬 하늘

그 無限을 우러러보며

서 있는

大地의 나무들처럼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가득하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영원한 日月의 영원한

이 回轉 속에서

너와 나, 우리는

約束된 旅路를 동행하는

有限한 生命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더욱더

가까이 이어져라

 

 


 

 

조병화 시인 / 회로

 

 

혹시나 그대를 만날까 하고

그대 머리카락이 스치던 거리로 가노라

 

나는 또다시 실망하노라

 

텅빈 공간에 그대와 같은 명사는 잃고

우거진 군상 속에 나만이 이단처럼 걸어가노라

 

아 나는 아노라

행복으로 돌아가는 모든 순서를 아노라

삶의 그러한 인습을 아노라

 

오랜 어버이들이 맺어온 理性의 그것이

생명이 넘치는 비극의 종막에 서서

고집의 소리가 이미 허세함을 아노라

 

나는 모든 금지 구역을 또다시 걸어가노라

 

명일에 연속하는 나의 슬픔은 그대 것이요,

그대 슬픔을 걸어가며 나는 행복하노라

그대 머리카락이 스치던 거리로 걸어가며

나는 또다시 행복하노라

 

 


 

 

조병화 시인 / 혼자라는 거

 

 

밤 2시경

잠이 깨서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닥

 

조물주는 마지막에 있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잔인한 거

 

사랑하는 사람아

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아

 

 


 

 

조병화 시인 / 호수

 

 

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조병화 시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