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모 시인 / 멸입(滅入)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시집<카오스의 사족>1958
정한모 시인 / 나비의 여행
아기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 사상계>1965.11
정한모 시인 /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여백을 위한 서정>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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