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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한모 시인 / 멸입(滅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6.

정한모 시인 / 멸입(滅入)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시집<카오스의 사족>1958

 

 


 

 

정한모 시인 / 나비의 여행

 

 

아기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 사상계>1965.11

 

 


 

 

정한모 시인 /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여백을 위한 서정>1959

 

 


 

정한모(鄭漢模) 시인 / 1923∼1991

충남 부여 출생. 서울대 국문과(1955)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1959). 1945년 동인지 『백맥』에 시 「귀향시편」발표 등단. 서울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문화공보부 장관 등 역임. 저서-시집 『카오스의 사족』(범우사, 1958), 『여백을 위한 서정』(신구문화사, 1959), 『아가의 방』(문원사, 1970), 『새벽』(일지사, 1975), 『아가의 방 별사』(문학예술사, 1983), 연구서 『문학개론』(청운출판사, 1966), 『현대시론』(민중서관, 1973), 『현대시문학사』(일지사, 1974),『한국현대시의 현장』(박영사, 1983) 등. 기타 한국시인협회상(1971)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