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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한등(寒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5.

김광균 시인 / 한등(寒燈)

 

 

기울어진 경사(傾斜) 위에 걸려 있는 한등(寒燈)에

불이 켜지면

성북동 계곡에 밤이 내린다.

 

아―

그 가늘고 고단한 불빛.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까마귀 둥우리가 하나 있고

그 너머로

거리의 오색 등불이 껐다 켜진다.

 

무수한 세월에 등을 밀리어

나는 여기 홀로 서 있으나

머지 않아 이곳을 떠나야 한다.

 

밤이 깊어 집들은 창을 내리면

사람들이 침소(寢所)로 돌아간 뒤에

등불이 혼자 남아

성북동의 밤을 지키고 있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한려수도

 

 

한려수도가 안개 속을 달리어간다.

갈매기 날개 위에

떠올랐다 잠기어 가는 섬 섬들

그곳에는 누가 사는지

한 줄기 밥짓는 연기

어두워오는 파도 위에 서리어 있다.

 

삼선도(三仙島) 가까이

낡은 배는 기웃거리고

삼천포 향하여 기적을 울리고 가나

밀려나가고 또 되돌아오는

바닷물의 나즉한 통곡 소리뿐

 

이 사망(沙望) 파도 끝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소리와 함께 저무는 인생 위에

내 조그만 사념(思念)의 배는 돛대를 내리고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는 것일까

 

해도 저물고 섬도 저물고

한려수도는 끝이 없고나

껴안고 싶은 섬돌 하나 둘 사라진 뒤에

떼지어 오는 바람 배 난간을 때리고

나는 어두운 램프등(燈) 아래 기대어 앉아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모―든 것에 눈을 감는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해바라기의 하―얀 꽃잎 속엔

퇴색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흐트리고 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무덤 위에 등불을 키러

나는

밤마다 눈멀은 누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빛이 파―란 산길을 넘고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향수의 의장(意匠)

 

 

□ 황혼에 서서

 

바람에 불리우는 서너 줄기의 백양나무가

고요히 응고한 풍경 속으로

황혼이 고독한 반음(半音)을 남기고

어두운 지면(地面) 위에 구을러 떨어진다

 

저녁 안개가 나즉히 물결치는 하반(河畔)을 넘어

슬픈 기억의 장막 저편에

고향의 계절은 하이―얀 흰 눈을 뒤집어쓰고

 

□ 동화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을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싸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