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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조화(弔花)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4.

김광균 시인 / 조화(弔花)

 

 

여기 호올로 핀 들꽃이 있어

자욱―히 내리는 안개에

잎사귀마다 초라한 등불을 달다

 

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

소리도 없이 퍼붓는 어둠

먼― 종소리 꽃잎에 지다

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

이는 떠나간 네 넋의 슬픈 모습이기에

지나던 발길 절로 멈추어

한 줄기 눈물 가슴을 적신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창백한 산보

 

 

오후

하이얀 들가의 외줄기 좁은 길을 찾아 나간다

 

들길엔 낡은 전신주가

의장병(儀仗兵)같이 나를 둘러싸고

논둑을 헤매던 한 떼의 바람이

어두운 갈대밭을 흔들고 사라져 간다

 

잔디밭에는

엷은 햇빛이 화분(花粉)같이 퍼붓고

고웁게 화정장(花程粧)한 솔밭 속엔

흘러가는 물소리가 가득―하고

 

여윈 그림자를 바람에 불리우며

나 혼자

조락한 풍경에 기대어 섰으면

쥐고 있는 지팽이는 슬픈 피리가 되고

금공작(金孔雀)을 수놓은 옛 생각은 섧기도 하다

 

저녁 안개 고달픈 기폭(旗幅)인 양 내리덮인

단조로운 외줄기 길가에

앙상한 나뭇가지는

희미한 촉수를 저어 황혼을 부르고

 

조각난 나의 감정의

한 개의 슬픈 건판(乾板)인 푸른 하늘만

멀―리 발 밑에 희미하게 빛나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추일서정(秋日抒情) -1-

 

 

가을풀 길길이 누운 언덕 위에

소월(素月)은 무명옷을 입고 서 있다

남시(南市)의 십년(十年)을 떨치고 일어나

흰구름 오가는 망망한 남쪽 바라다보며

원망이 서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꿈을 깨고 일어나 창문을 여니

창 밖에는 가을이 와 있었다.

돌담 위에 서린 안개 속에

가지마다 휘어진 감들이 보인다

팔, 구월에 달려 있던 청시(靑柿)들

알알이 등불을 켜고

감나무는 절반이 가을 하늘에 잠기어 있다

아― 어느 보이지 않는 손이 열매를 맺게 하고

조용히 지상(地上)을 지나간 것일까.

 

어둡고 지루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뭇잎들은 황엽(黃葉)이 지고

사람들은 가을 도배를 하고 새옷을 꺼내 입는다

허망히 떠나가는 한 해를 다시 보내며

괴로운 세월(世月)에 부대끼는 사람들

그들의 지붕 위에

다사로운 가을 햇빛이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들어앉아

처마끝을 지나가는 바람 소릴 듣는다

가을은 찬바람을 몰고 와

지상(地上)에 모든 것을 조락시키며

무한한 곳으로 떠나나 보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취적(吹笛)벌

 

 

구월은 서러운 달

해 지는 신작로길 풀벌레에 묻히고

취적벌 자갈밭엔 오늘도 바람이 부나.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것,

벌떼처럼 초록별 날아오던 초가지붕 밑

희미한 등잔 아래 구겨진 어머니 얼굴.

밤꽃이 내려 쌓이던 황토산(黃土山) 마루

노래를 잊어버린 어린애들의

비인 눈동자에 노을은 지나.

허공에 걸려 있는 한낮 서러운 등불처럼

어두운 지평 한끝에 깜박거리는 옛 마을이기

목메는 여울가에 늘어선

포프라나무 사이로 바라다뵈는

한 줄기 신작로 너머

항시 찌푸린 한 장의 하늘 아래

사라질 듯이 외로운 고향의 산과 들을 향하여

스미는 오열 호올로 달램은

내 어느 날 꽃다발 한아름 안고

찾아감을 위함이리라.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파도가 있는 해안에 서서

 

 

어두워 가는 해안의 별빛 조으는 곳에

흐릿한 은선(銀線)을 저어 가는 상선(商船)의 돛대는 잠기어 가고

고독한 노을에 덮인 부두의 황혼에 서서 멀―리

고개 숙인 마음에

저물어 가는 파도 소리는 목메어 온다

 

창백한 해양의 물결에 잠긴 작은 항구의 가슴을 떠나

밤마다 안개에 덮인 푸른 바다의 월광을 굴러가는

낙엽의 탄가(嘆歌)에 젖은 희미한 뱃노래는

지금 어두운 밤바다 위를 헤매고

처량한 음계 위에 스러져가는 파도의 노래 위를

고향을 찾아가는 갈매기의 늘어진 두 날개는 애처롭다

 

밤새도록 서리에 젖은 등대의 시선을 쫓아

끝없는 비극 속에 누워 있는 먼― 선로(船路)의 가는 곳에 오늘밤

전도한 수평선 위에 적막한 애상을 그리는 마음이

해안을 스쳐가는 낙엽 속에 고요히 휘파람을 분다

날카로운 시각에 허물어진 그리운 우리들의 항로여

푸른 바다를 스쳐가던 화려하였던 그 시절의 애처러운 회억(回憶)이여

 

이즈러진 현실의 어두운 장렬(葬列)을 떠나 보낸 포구는 말이 없고

육지를 떠나 헤어져 가는 발자취 속에

긴― 성조(星條)의 애화(哀話)를 속삭이던 어두운 물결도 이제는 대답이 없다

 

조선중앙일보, 1934. 3. 12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