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 / 야차(夜車)
모두들 눈물지우며 요란히 울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라
내 폐가(廢家)와 같은 밤차에 고단한 육신을 싣고 몽롱한 램프 위에 감상(感傷)은 자욱―한 안개가 되어 내리나니 어디를 가도 뇌수를 파고드는 한 줄기 고독
절벽 가까이 기적은 또다시 목메어 울고 다만 귓가에 들리는 것은 밤의 층계를 굴러내리는 처참한 찻바퀴 소리
아―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영미교(永美橋)
경마장 낡은 철책 위에 가마귀 떼지어 울고 장안을 왕래하는 무수한 인마(人馬) 이곳을 스쳐가나 벗은 여기 백포(白布)에 싸여 말이 없으니 서른다섯의 짧은 세상 다녀가기 그리 총총하고 서러웠던가.
애처럽고나 우리 서로 기약한 일 뉘게 말하랴. 어린 상제 나란히 목메어 울며 황망한 모색(暮色) 위에 꽃을 뿌리나 시들은 갈댓잎 바람에 서걱거리고 어둠 속에 사라지는 남천(南川) 물소리.
새봄이 오면 오간수(五間水)엔 봄빛이 흐르고 천변(川邊)가의 잔디도 움 돋아 오리 아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왕십리 하늘 밑을 서성거리랴.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오월화(五月花)
세월이 오면 꽃피고 세월이 가면 꽃이 진다.
꽃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한숨도 역겨워
사람만 가면 안 오나 보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오후의 구도(構圖)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방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 밖에 나즉히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얀 기적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긴―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카―텐을 새어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여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소리뿐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장곡천정에 오는 눈
찻집 미모사의 지붕 위에 호텔의 풍속계 위에 눈이 내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소음의 호수 잠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위에 낡은 필림 같은 눈이 내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내리는 눈발이 속살어린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기항지, 정음사, 1947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인보 시인 / 근화사 삼첩 외 2편 (0) | 2019.08.14 |
---|---|
장서언 시인 / 이발사의 봄 (0) | 2019.08.14 |
이한직 시인 / 높새가 불면 외 3편 (0) | 2019.08.13 |
이은상 시인 / 사랑 외 4편 (0) | 2019.08.13 |
김광균 시인 / 산 1 외 4편 (0) | 2019.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