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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야차(夜車)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3.

김광균 시인 / 야차(夜車)

 

 

모두들 눈물지우며

요란히 울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라

 

내 폐가(廢家)와 같은 밤차에 고단한 육신을 싣고

몽롱한 램프 위에

감상(感傷)은 자욱―한 안개가 되어 내리나니

어디를 가도

뇌수를 파고드는 한 줄기 고독

 

절벽 가까이 기적은 또다시 목메어 울고

다만 귓가에 들리는 것은

밤의 층계를 굴러내리는

처참한 찻바퀴 소리

 

아―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영미교(永美橋)

 

 

경마장 낡은 철책 위에 가마귀 떼지어 울고

장안을 왕래하는 무수한 인마(人馬)

이곳을 스쳐가나

벗은 여기 백포(白布)에 싸여 말이 없으니

서른다섯의 짧은 세상 다녀가기

그리 총총하고 서러웠던가.

 

애처럽고나

우리 서로 기약한 일 뉘게 말하랴.

어린 상제 나란히 목메어 울며

황망한 모색(暮色) 위에 꽃을 뿌리나

시들은 갈댓잎 바람에 서걱거리고

어둠 속에 사라지는 남천(南川) 물소리.

 

새봄이 오면

오간수(五間水)엔 봄빛이 흐르고

천변(川邊)가의 잔디도 움 돋아 오리

아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왕십리 하늘 밑을 서성거리랴.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오월화(五月花)

 

 

세월이 오면 꽃피고

세월이 가면 꽃이 진다.

 

꽃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한숨도 역겨워

 

사람만 가면 안 오나 보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오후의 구도(構圖)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방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 밖에

나즉히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얀 기적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긴―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카―텐을 새어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여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소리뿐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장곡천정에 오는 눈

 

 

찻집 미모사의 지붕 위에

호텔의 풍속계 위에

눈이 내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소음의 호수 잠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위에

낡은 필림 같은 눈이 내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내리는 눈발이 속살어린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