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직 시인 / 높새가 불면
높새가 불면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아 짚세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황 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그리고 산술도 다 잊어버리고
백화(白樺)를 깎아 묘표(墓標)를 삼고 동원(凍原)에 피어 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꽃이 되오리
높세가 불면
이한직 시인 / 강하(降下)
첫눈 내리던 밤이었다. 가설(假說)같이 우원(迂遠)한 너의 애정(愛情)에는 무엇보다도 흰것이 잘 어울렸는데 애달픈 나의 향일성(向日性)을 받들어줄 별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기울어진 사상(思想)은 조화(造花)처럼 퇴색하려고 하였다 붕대에 싸인 나의 人生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다.
아득한 기억(記憶)속에 마지막 아마리리스인 양 너와의 약속(約束)이 피어남고 화액(花液)은 오히려 죄(罪)와 같이 향기로워 첫눈 내리는 밤이다 계절(季節)에의 공감(共感)만이 가난한 나의 가슴을 아름다히 장식하였다.
두 눈에서 넘쳐 흐르는 것은 흡사 눈물같이 따스하였으나 나는 구태여 휘파람을 날렸다
바로 그날 밤이다 차라리 노리개처럼 살려고 결심(決心)한 것은.
이한직 시인 / 또 다시 허구의 봄이
나 이제 좀 疲困하여 청춘 그 어느 길목에 우두커니 섰노라
나와는 無緣한 것 꽃들이어
너희들 다시 한번 그 곳에 마음것 피어보려나 거짓의 기도와 거짓의 맹서와 그리고 거짓의 포옹
이 도시에는 도모지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그래도 나는 또다시 이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종점에 다다르려고 하는 나의 여정이어 병든 예감이 소년처럼 가슴 설레여 기다리는 것은 아아 이러한 허구의 봄이 아니라 너의 발자국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바람차게 나부끼는 나의 검은 종언의 旗발이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대신 나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
- 시집 『이한직시집』/ 문리사 (1976)
이한직 시인 /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반듯이 누운 가슴 위에 함박눈마냥 소복히 내려 쌓이는 것이 있다. 무겁지는 않으나 그것은 한없이 차거운 것 그러나 자애롭고 따스한 손이 있어 어느 날엔가 그위에 와서 가만히 놓이면 이내 녹아 버리고야 말을 것 몸짓도 않고 그 차거움을 견딘다.
전구(傳求)하라 산타마리아 이 한밤에 차거움을 견디는 그 가슴을 위하여 전구하라.
삶과 살음으로 말미암은 뉘우침과 또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나이는 반듯이 누운채 눈을 감아본다.
이 한밤에 함박눈은 풀풀 내려 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지붕 위에도 뉘우침의 함박눈은
그렇다 동정 마리아여 이 가슴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모든 지붕과 그밑에 놓인 삶들을 위하여 그대 주에게 전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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