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 / 산 1
꿈 속에 아아(娥娥)한 연봉(連峰)이 솟아 있더니 아침에 침묵의 계곡에서 올라오는 안개 속에 산은 서 있다.
영원을 향하여 길길이 누워 끝없는 산들 솔개미 하나 안 뜬 하늘 저쪽에 그 끝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어두워 오는 황혼에 산들은 되돌아온다. 낙조에 잠겨 가는 수풀 속으로 바람 소리를 몰아 오면서
깊은 밤중에 고독한 이마를 달빛에 적시며 산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북두칠성이 자정 넘어 기울어진 뒤 천년이 동터 오는 새벽을 향하여 산들은 돌아눕는다.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시인 / 석고의 기억
창백히 여윈 석고의 거리엔 적은 창문이 있고 어두운 가열(街列)이 그친 곳에 고웁게 화장한 종루(鐘樓)가 하나 달빛 속에 기울어지고
자금빛 향수 위에 그렇게 화려한 날개를 펴던 지금 나의 망막 위에 시들은 청춘의 화환이여 나는 낡은 애무의 두 손을 벌려 너를 껴안고 싸늘―히 식어진 네 가슴 위에 한 포기 장미와 빛나는 오월의 구름을 던져 주련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수철리(水鐵里)
산비탈엔 들국화가 환―하고 누이동생의 무덤 옆엔 밤나무 하나가 오뚝 서서 바람이 올 때마다 아―득한 공중을 향하여 여윈 가지를 내어저었다. 갈길을 못 찾는 영혼 같애 절로 눈이 감긴다. 무덤 옆엔 적은 시내가 은실을 긋고 등뒤에 서걱이는 떡갈나무 수풀 앞에 차단―한 비석이 하나 노을에 젖어 있었다. 흰나비처럼 여윈 모습 아울러 어느 무형(無形)한 공중에 그 체온이 꺼져 버린 후 밤낮으로 찾아 주는 건 비인 묘지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뿐. 동생의 가슴 위엔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적막한 황혼이면 별들은 이마 위에서 무엇을 속삭였는지 한줌 흙을 헤치고 나즉―히 부르면 함박꽃처럼 눈뜰 것만 같애 서러운 생각이 옷소매에 스몄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승용마차
안개 속을 말이 간다. 기울어진 지붕에 가스등을 달고 허리엔 녹슬은 방울 소리 마권(馬券) 없는 경마장인 서울 거리 네거리마다 서서 마른기침을 한다. 종로에 밤이 들면 짓무른 두 눈에 거리의 등불이 곱긴 하다만 말아 늙은 회사원처럼 등이 굽은 말아 가을 바람에 낡은 갈기 흩날리며 술취한 손을 싣고 어딜 가느냐. 고오스톱과 신호등을 부숴버리고 마부와 고삐를 내어던지고 차라리 민주주의 쪽을 향하여 오곡이 익은 들로 달려라.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신촌(新村)서
구름은 한 떼의 비둘기 꽃다발같이 아련―하고나
전봇대 열을 지어 먼―산을 넘어가고 늘어선 수풀마다 초록빛 별들이 등불을 켠다
오붓한 동리 앞에 포프라나무 외투를 입고
하이―얀 돌팔매같이 밝은 등불 뿌리며 이 어둔 황혼을 소리도 없이 기차는 지금 들을 달린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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