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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복사꽃과 제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1.

김광균 시인 / 복사꽃과 제비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찾아왔구나.

 

어린것 껴안고 뜨거운 눈물로 뺨을 부비노니

너희들 키워줄 새 나라 언제 세워지느냐.

 

낮이면 꽃그늘에 벌떼와 함께 돌아다니고

밤이면 박수치는 파도 위로 은빛 마차 휘몰아가고

 

거칠은 바람 속게 다만 고이 자라라

온 겨레의 등에 진실한 땀이 흐르는 날

너 가는 길에 새로운 장미 피어나리니

황량한 산과 들 너머

장미여 삼천리에 춤을 늘여라.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돌아왔구나.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비(碑)

 

 

어머님은 지나간 반생의 추억 속에 사신다

어머님의 백발을 에워싸고

추억은 늘 희미한 원광을 띠고 있다

 

창랑한 기적이 오고가는 정거장에서

유적(流滴)의 길가에 스미는 황량한 모색(暮色) 앞에서

내 서러운 도시 위에 낮과 밤이 바뀔 때마다

내 향수의 지붕 위를 바람이 지날 때마다

어머님의 다정한 모습 두 눈에 어려

온―몸이 젖는다

황홀히 눈을 감는다

 

어머님은 항시 고향에 계시면서도

항시 나와 함께 계신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비풍가(悲風歌)

 

 

쓸쓸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진흙빛 산과 들을 건너

황량한 도시의 등불을 죽이고

떼지어 오는 통곡 소리.

 

램프에 심지를 돋군다.

비인 방에 가득한 벌레 소리에

눈이 감긴다.

 

항시 돌팔매에 쫓겨 온 서른네 해

내 가는 길에

또다시 찬비 뿌리고 잎이 돋는가.

 

기적 소리 따라가고 싶고나

거기 쓸쓸한 사람이 모여 사는 곳

허망한 세월에 부대껴

내 속절없이 돌아가는 날

햇볕 다사롭고

오곡은 무르렀으리.

 

원통한 생각이 밤새 끓어오른다.

원통한 생각에 밤새 잠이 안 온다.

별은 내 이마 위에 못을 박고

어제 벗었던 상복 다시 입는가.

바람이여

화살을 싣고 나를 따르라

나도 인제 나의 원수를 찾자.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빙화(氷花)

 

 

이즈러진 가로(街路)의 어두운 화포(畵布) 위에

밤 깊도록 함박눈이 스쳐갑니다.

 

가버린 시절의 발자취같이

소리도 없이 퍼붓는 눈은

먼― 계절의 그리운 향기입니까.

 

조각난 달빛같이 싸늘한 빛을 하고

내 가슴 위에 눈부신 장미를 던져 줍니다.

 

얼어붙은 분수같이 하이―얀 가등(街燈) 위에

송이송이 꽃다발이 흩어집니다.

 

이 어두운 밤에 초라한 상복을 입고

슬픈 기억 위에 내리는 눈은

자취도 없는 청춘의 낙엽입니까.

 

화려한 음악같이 수없는 날개를 달고

내 마음 위에 서글픈 추회(追悔)의 시(詩)를 씁니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사향도(思鄕圖)

 

 

□ 정거장

 

긴― 하품을 토하고 섰던 낮차가 겨우 떠난 뒤

 

텅 비인 정거장 앞마당엔

작은 꽃밭 속에 전신주 하나가 조을고 섰고

한낮이 겨운 양지 쪽에선

잠자는 삽살개가 꼬리를 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치어다보고 짖고 있었다.

 

□ 목가(牧歌)

 

장다리꽃이 하―얀 언덕 너머 들길에

지나가는 우거(牛車)의 방울 소리가

긴― 콧노래를 웅얼거리고

김매는 누이의 바구니 옆에서

나는 누워서 낮잠을 잤다.

어두워 오는 황혼이면

흩어진 방앗간에 나가 나는 피리를 불고

꼴 먹이고 서 있는 형님의 머리 위에

남산(南山)은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 교사(校舍)의 오후

 

시계당(時計堂) 꼭대기서

하학(下學) 종이 느린 기지개를 켜고

백양나무 그림자가 교정에 고요한

맑게 개인 사월의 오후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창 너머로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

어두운 교실 검은 칠판엔

날개 달린 `돼지'가 그려 있었다.

 

□ 동무의 무덤

 

진달래를 한아름 안고 산길을 내려오다

골짜기 너머 공동묘지에 올라

우리들은 모자를 벗고 눈을 감았다.

 

지금 아득―히 생각나는 이른 봄날 황혼

가난하였던 동무의 무덤 위엔

하―얀 요령초(搖鈴草)가 바람에 흔들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작은 패목은

가늘은 실비에 젖어 있었다.

 

□ 언덕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리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별이 하나 둘 늘어갈 때면

우리들은 나발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가엔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