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삼베 무명 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창(窓)
우리 방으로는 창(窓)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진귀한 고서(古書)를 펴서 서항기(書港氣)나 기를까.
나의 추(醜)와 미(美) 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苦)와 낙(樂)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임종(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젖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박연 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이 흐르던 물이 그ㅊ지 아니하도다
< 가람시조집>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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