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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윤곤강 시인 / 피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0.

윤곤강 시인 / 피리

 

 

보름이라 밤 하늘의

달은 높이 현 등불 다호라

임하 호올로 가오신 임하

이 몸은 어찌호라 외오 두고

너만 혼자 홀홀히 가오신고.

 

아으 피맺힌 내 마음

피리나 불어 이 밤 새오리

숨어서 밤에 우는 두견새처럼

나는야 밤이 좋아 달밤이 좋아.

 

이런 밤이사 꿈처럼 오는 이들 ---

달을 품고 울던 <벨레이느>

어둠을 안고 간 <에세이닌>

찬 구들 베고 간 눈 감은 고월(古月), 상화(尙火)

낮으란 게인양 엎디어 살고

밤으란 일어 피리나 불고지라.

 

어두운 밤의 장막 뒤에 달 벗삼아

임이 끼쳐 주신 보밸랑 고이 간직하고

피리나 불어 설운 이 밤 새오리

 

다섯 손꾸락 사뿐 감아 쥐고

살포시 혀를 대어 한 가락 불면

은쟁반에 구슬 구을리는 소리

슬피 울어 예는 여울물 소리

왕대숲에 금바람 이는 소리….

 

아으 비로서 나는 깨달았노라

서투른 나의 피리 소리언정

그 소리 가락 가락 온 누리에 퍼지어

 

붉은 피 방울 방울 돌면

찢기고 흩어진 마음 다시 엉기리

 

 


 

 

윤곤강 시인 / 진리(眞理)에게

 

 

어떤 어둠 속에서도 진리(眞理)! 너는

항상 불타는 뜻을 잃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비바람 눈보라 속에

날개를 찢기고 찢기면서도 너는

단 한 번 고개 숙인 적이 없구나.

불타는 넋이여, 곧고 억센 힘이여.

너는 언제나 깊은 잠 속에서도 깨어나

화살처럼 곧고 빠른 네 뜻을 세워나간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큰 힘이 있어

너를 내놓아라, 나에게 울러댄다면

진흙 속에 얼굴 파묻고 고꾸라질지라도

나는 못 주겠노라 오직 너 하나만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죽은 이처럼

빛나는 눈알에 괴로운 입술 깨물어

삶과 죽음을 넘어선 삶의 기쁨을 안고

찬란한 네 품에 안겨 눈감을지라도…

 

오오, 영원한 세월 속에 사는 것,

너만이 끊임없이 괴로움 속에서

새벽을 알려주는 쇠북소리.

너만이 새날이 닥쳐옴을 알려주고

너만이 살아있는 보람을 믿게 해주고

너만이 나와 나의 벗들의 흩어진 마음을

보이지 않는 실마리로 굳게 얽어준다.

 

 


 

 

윤곤강 시인 / 꽃피는 달밤에

 

 

빛나는 해와 밝은 달이 있기로

하늘은 금빛도 되고 은빛도 되옵니다.

 

사랑엔 기쁨과 슬픔이 같이 있기로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으오이다.

 

꽃피는 봄은 가고 잎피는 여름이 오기로

두견새 우는 달밤은 더욱 슬프오이다.

 

이슬이 달빛을 쓰고 꽃잎에 잠들기로

나는 눈물의 진주구슬로 이 밤을 새웁니다.

 

만일 당신의 사랑을 내 손바닥에 담아

금방울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아아, 고대 죽어도 나는 슬프지 않겠노라.

 

 


 

윤곤강(尹崑崗) 시인 / 1909~1949

충남 서산에서 출생. 보성 고보를 거쳐 연희 전문 학교에서 수학, 1934년경 경향파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퇴폐적 사조와 풍자적 경향의 시를 썼다. 광복 후에 그의 시는 많이 안정되어 고려 가요의 율조와 민족적 정서의 탐구로 발전하였다. 동인지 <시학>을 주재했으며, 보성 중학교 교사와 중앙 대학 교수, 성균관 대학 강사를 지냈다. 시집에 <대지> <만가> <피리> <동물 시집> 살어리>, 시론집에 <시와 진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