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 / 대낮
칸나의 입술을 바람이 스친다 여윈 두 어깨에 햇빛이 곱다
칸나의 꽃잎 속엔 죽은 동생 서러운 얼굴 머리를 곱게 빗고 연지를 찍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대낮 비인 마당 한구석에서 우리 둘은 쓸쓸히 웃는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대화
머루덩쿨이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내리고 파랑새 한 마리 푸른 햇빛을 쪼읍고 있는 낙엽이 그윽―한 수풀가에서 가엾이 두 눈이 먼 계집애를 만났습니다. 눈부신 치맛자락 물결 위에 서리이고 외로운 암사슴같이 시냇가에 울고 있어요.
그것은 어려서 죽은 네 누이란다. 이마에 작을 별을 가지고 두 볼이 장미 같은 계집애였다. 뚫어진 지등(紙燈) 위에 밤비 뿌리고 호롱불이 바위 위에 졸던 밤에 초라한 무명옷에 눈물지우며 호을로 산길을 넘어갔었다.
청동화로에 촛불이 타고 녹슬은 촉대(燭臺) 위에 함박눈이 퍼붓던 겨울밤이면 흩어진 오색꿈 고요히 지켜 주고 밤바람이 서글픈 바닷가에 나가면 아득―한 물거품 속에서 나를 부르는 이가 누구입니까.
이끼 앉은 돈대 너머 흩어진 오동잎이 곱게 빛나고 수풀가에 흰 비둘기 떼지어 울던 날 흰구름을 헤치고 가서 안 오는 네 아버지의 그리운 목소린 게지.
어머니 이 화창한 하늘 아래 왜 우십니까. 들길 위엔 하―얀 영란(鈴蘭)이 졸고 파도 소리가 산너머 고요합니다. 땅 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은빛 마차를 내어 주셔요, 흰 국화를 한아름 가슴에 안고 누나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렵니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목련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 지도 이제는 10여 년 목련은 해 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을고 있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목상(木像)
집에는 노처(老妻)가 있다. 노처(老妻)와 나는 마주 앉아 할 말이 없다.
좁은 뜨락엔 오월이면 목련이 피고 길을 잃은 비둘기가 두어 마리 잔디밭을 거닐다 간다.
처마 끝에 등불이 켜지면 밥상을 마주앉아 또 할 말이 없다.
연년 세세(年年歲歲)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우리 둘은 목상(木像)이 돼 가나 보다.
임진화, 범양사, 1989
김광균 시인 / 밤비
어두운 장막 너머 빗소리가 슬픈 밤은 초록빛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갈까요
나즉히 물결치는 밤비 속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포도(鋪道)를 가면 바람에 지는 진달래같이 자취도 없는 고운 꿈을 뿌리고 눈부신 은실이 흩어집니다
조각난 달빛같이 흐득여 울며 스산―한 심사 위에 스치는 비는 사라진 정열의 그윽―한 입김이기에
낯설은 흰 장갑에 푸른 장미르 고이 바치며 초라한 가등(街燈) 아래 홀로 거닐면 이마에 서리는 해맑은 빗발 속엔 담홍빛 꽃다발이 송이송이 흩어지고 빗소리는 다시 수없는 추억의 날개가 되어 내 가슴 위에 차단―한 화분(花粉)을 뿌리고 갑니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은상 시인 / 가고파 외 4편 (0) | 2019.08.11 |
---|---|
이병기 시인 / 고향으로 돌아가자 외 3편 (0) | 2019.08.11 |
이병기 시인 / 아차산 외 4편 (0) | 2019.08.10 |
윤곤강 시인 / 피리 외 2편 (0) | 2019.08.10 |
김광균 시인 / 구의리(九宜里) 외 4편 (0) | 2019.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