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젖은 하다마는 풀섭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이병기 시인 / 비 2
짐을 메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來日)도 나리오소서 연일(連日)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매화 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이병기 시인 / 난초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주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震)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난초 1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 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이병기 시인 / 난초 2 새로 난 난초 닢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꺽이는 양을 참아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츰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긔는 물밀듯이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참아 어찌 뜨리아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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