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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아차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0.

이병기 시인 /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젖은 하다마는

풀섭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이병기 시인 / 비 2

 

 

짐을 메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來日)도 나리오소서 연일(連日)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매화 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이병기 시인 / 난초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주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震)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난초 1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 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이병기 시인 / 난초 2


새로 난 난초 닢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꺽이는 양을 참아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츰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긔는 물밀듯이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참아 어찌 뜨리아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