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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구의리(九宜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9.

김광균 시인 / 구의리(九宜里)

 

 

쓸쓸하고나

구의리(九宜里) 모래밭에

내리는 밤비

비인 들에 가득한

물소리 찾아

갈대밭 찾아

갈대밭 헤치고

내려가 볼까.

 

광나루 십릿벌엔

누가 우느냐

눈물에 어린 길을

등불이 간다.

저 등불 사라지면

밤이 새는지.

 

천리에 사모치는

물길을 좇아

바람도 가다가는

돌아오는데

고달픈 날개

여울물을 적시고

물새는 어느 곳에

잠이 들었나.

 

쓸쓸도 하다

구의리(九宜里) 모래밭을

적시는 밤비

서러운 생각

고요히 싸서

강기슭 풀언덕에

묻어 버릴까.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기적(汽笛)

 

 

잠결에

기적이 들린다.

사람들이 잠든 길은 밤중에

멀리서 가차이서

기적은 서로

쓸쓸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밤중에 들리는 기적 소리는

멀―리 간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들을

생각케 한다.

내 추억의 촉대(燭臺) 위에

차례차례로

불을 켜고 간 사람들

그들의 영혼이

지금 도시의 하늘을 지나가는지.

 

기적이 운다.

기적은 공중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

나는 얼결에

잃어진 생활의 키를 생각한다.

기적이 운다.

발을 구른다.

고가선(高架線) 위에 걸려 있는

마지막 신호등을 꺼버리고

아 새벽을 향하여

모두들 떠나나 보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노신(魯迅)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눈 오는 밤의 시(詩)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

이 밤 내 조그만 그림자 위에 눈이 내린다

눈은 정다운 옛 이야기

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

좁은 길에 흩어져

아스피린 분말이 되어 곱―게 빛나고

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

그 위를 지나간다

눈은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

고독한 도시의 이마를 적시고

공원의 동상 위에

동무의 하숙 지붕 위에

캬스파처럼 서러운 등불 위에

밤새 쌓인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다시 목련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니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내리더니

목련은 한 잎 두 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 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 볼까

 

임진화, 범양출판사, 1989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