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 / UN군 묘지에서
꽃 하나 피지 않고 한 포기 풀도 없는 거칠은 황토 언덕에 이미 고토(故土)에 돌아갈 수 없는 몸들이 누워 수정 십자가떼 바람에 통곡하는 수영(水營) 앞바다 파도는 서러운 소리를 내고 동서로 갈리나 그대들의 고국은 자욱한 수연(水煙)에 가려 찾을 길 없고나.
낯선 나라 항구에 내려 포화를 헤치며 북녘 향할 때 오늘 이곳에 하나의 표목(標木)이 될 줄 어찌 뜻하였으랴. 서러운 노래 천리를 덮고 꽃그림자 어두운 사월(四月) 초이일(初二日) 우리 이곳에 서서 한 잔 술을 뿌리니 그대들의 피로 물들인 신세계(新世界)의 철문 위에 그대들, 만년(萬年)을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 되라.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가로수
□ 1
푸른 잔디를 뚫고 서 있는 체조장 시계탑 위에 파―란 기폭이 바람에 부서진다
무거운 지팽이로 흰구름을 헤치고 교당(敎堂)이 기울어진 언덕을 걸어 내리면 밝은 햇빛은 화분(花粉)인 양 내려 퍼붓고 거리는 함박꽃같이 숨을 죽였다
□ 2
명등(明燈)한 돌다리를 넘어 가로수에는 유리빛 황혼이 서려 있고 포도(鋪道)에 흩어진 저녁 등불이 창백한 꽃다발같이 곱기도 하다
꽃등처럼 흔들리는 작은 창 밑에 밤은 새파란 거품을 뿜으며 끓어오르고 나는 동상이 있는 광장 앞에 쪼그리고 길 잃은 세피아의 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고향
하늘은 내 넋의 슬픈 고향 늙은 홀어머니의 지팽이같이 한 줄기 여윈 구름이 있어 가을바람과 함께 소슬하더라.
초라한 무명옷 이슬에 적시며 이름 없는 들꽃일래 눈물지었다. 떼지어 우는 망아지 등 너머 황혼이 엷게 퍼지고 실개천 언덕에 호롱불 필 때
맑은 조약돌 두 손에 쥐고 노을을 향하여 달리어갔다.
뒷산 감나무꽃 언제 피었는지 강낭수수밭에 별이 잠기고 한 줄기 외로운 모깃불을 올리며 옷고름 적시시던 설운 뒷모습 아득―한 시절이기 더욱 그립다.
창망한 하늘가엔 나의 옛 고향이 있어 마음이 슬픈 날은 비가 내린다.
황혼가, 산호장, 1959
김광균 시인 / 공지(空地)
등불 없는 공지(空地)에 밤이 내리다 수없이 퍼붓는 거미줄같이 자욱―한 어둠에 숨이 잦으다
내 무슨 오지 않는 행복을 기다리기에 스산한 밤바람에 입술을 적시고 어느 곳 지향 없는 지각(地角)을 향하여 한옛날 정열의 창랑한 자취를 그리는 거냐 끝없는 어둠 저으기 마음 서글퍼 긴―하품을 씹는다
아― 내 하나의 신뢰할 현실도 없이 무수한 연령(年齡)을 낙엽같이 띄워 보내며 무성한 추회(追悔)에 그림자마저 갈가리 찢겨
이 밤 한 줄기 패잔병 되어 주린 이리인 양 비인 공지(空地)에 호올로 서서 어느 먼― 도시의 상현(上弦)에 창망히 서린 부오(腐汚)한 달빛에 눈물지운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광장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體鏡)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늘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標木) 되어 조으는 가등(街燈) 소리도 없이 모색(暮色)에 젖어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쫓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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