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윤곤강 시인 / 언덕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9.

윤곤강 시인 / 언덕

 

 

언덕은 늙은 어머니의 어깨와 같다.

 

마음이 외로워 언덕에 서면

가슴을 치는 슬픈 소리가 들렸다

언덕에선 넓은 들이 보인다

 

먹구렝이처럼 달아나는 기차는

나의 시름을 싣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언덕엔 푸른 풀 한포기도 없었다

 

들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날마다

가까워 오는 봄의 화상을 찾고 있었다

아아, 고대 죽어도 나는 슬프지 않겠노라.

 

 


 

 

윤곤강 시인 / 입추

 

 

소리 있어 귀 기울이면

바람에 가을이 묻어오는,

 

바람 거센 밤이면

지는 잎 창에 와 울고,

 

다시 가만히 귀 모으면

가까이 들리는 머언 발자취.

 

낮은 게처럼 숨어 살고

밤은 단잠 설치는 버릇,

 

나의 밤에도 가을은 깃들어

비인 마음에 찬 서리 내린다.

 

 


 

 

윤곤강 시인 / 세월(歲月)

 

 

소리 있어 귀 기울이면

바람에 가을이 묻어오는,

 

바람 거센 밤이면

지는 잎 창에 와 울고,

 

다시 가만히 귀 모으면

가까이 들리는 머언 발자취.

 

낮은 게처럼 숨어 살고

밤은 단잠 설치는 버릇,

 

나의 밤에도 가을은 깃들어

비인 마음에 찬 서리 내린다.

 

 


 

 

윤곤강 시인 / 황소

 

 

바보 미련둥이라 흉보는 것을

꿀꺽 참고 음메! 우는 것은

 

지나치게 성미가 착한 탓이란다

삼킨 콩깍지를 되넘겨 씹고

음메 울며 슬픔을 삭이는 것은

 

두 개의 억센 뿔이 없는 탓은 아니란다

 

 


 

 

윤곤강 시인 / 지렁이의 노래

 

 

아지못게라 검붉은 흙덩이속에

나는 어찌하여 한 가닥 붉은 띠처럼

기인 허울을 쓰고 태어 났는가

 

나면서부터 나의 신세는 청맹관이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여니

나는 나의 지나간 날을 모르노라

닥쳐올 앞날은 더욱 더 모르노라

다못 오늘만을 알고 믿을 뿐이노라

 

낮은 진구렁 개울속에 선잠을 엮고

밤은 사람들이 버리는 더러운 쓰레기속에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부르노니

 

오직 소리없이 고요한 밤만이

나의 즐거운 세월이노라

 

집도 절도 없는 나는야

남들이 좋다는 햇볕이 싫어

어둠의 나라 땅밑에 번듯이 누워

흙물 달게 빨고 마시다가

비 오는 날이면 따 우에 기어나와

갈 곳도 없는 길을 헤매노니

 

어느 거츤 발길에 채이고 밟혀

몸이 으스러지고 두도막에 잘려도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나는야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사노라

 

 

 


 

윤곤강(尹崑崗) 시인 / 1909~1949

충남 서산에서 출생. 보성 고보를 거쳐 연희 전문 학교에서 수학, 1934년경 경향파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퇴폐적 사조와 풍자적 경향의 시를 썼다. 광복 후에 그의 시는 많이 안정되어 고려 가요의 율조와 민족적 정서의 탐구로 발전하였다. 동인지 <시학>을 주재했으며, 보성 중학교 교사와 중앙 대학 교수, 성균관 대학 강사를 지냈다. 시집에 <대지> <만가> <피리> <동물 시집> 살어리>, 시론집에 <시와 진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