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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윤곤강 시인 / 단사(丹蛇)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8.

윤곤강 시인 / 단사(丹蛇)

---K에게

 

 

양귀비꽃 희게 우거진 길섶에

눈부시는 붉은 금

또아리처럼 그려 놓고

징그럽게 고운 꿈

서리고 앉은 짐승.

오오, 아름다운 꿈하!

 

주검처럼 고요한 동안

내 눈과 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징그러운 오뇌(懊惱)를 지녀, 너는

죄스럽게 붉은 한 송이 꽃이어라.

 

선뜻 대가리 감아 쥐고

휘휘 칭칭 목에 감아나 볼꺼나.

 

네 징그러운 속에 품은

해보다도 뜨거운 정열의 불꽃

낼름거리는 붉은 혓바닥으로

피도 안 나게 물어 뜯은 상채기---

 

이브. 유우리디스. 클레오파트라......

 

누리는 꽃 피는 여름이라

살구나무에 살구 열고

배나무에 배꽃 피는 시절......

 

어떤 이는 네 몸에서 사랑을 읽고

어떤 이는 네 몸에서 이별을 읽고

어떤 이는 네 몸에서 죽음을 읽었다

 

아으, 못 견디게 고와도 아리따와도

덥석! 껴안고 입맞추지 못함은

내 더러힌 몸 다시 씻지 못하는 죄인저!

 

 


 

 

윤곤강 시인 / 아지랑이

 

 

머언 들에서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

 

못 견디게 고운 아지랭이 속으로

달려도

달려가도

소리의 임자는 없고.

 

또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

머얼리서

더 머얼리서

들릴 듯 들리는 듯......

 

 


 

 

윤곤강 시인 / 나비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 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의 맥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진다.

 

 


 

 

윤곤강 시인 / 해바라기

 

 

벗아! 어서 나와

해바라기 앞에 서라.

 

해바라기꽃 앞에 서서

해바라기꽃과 해를 견주어 보자.

 

끓는 해는 못되어도

가을엔 해의 넋을 지녀

해바라기의 꿈은 붉게 탄다.

 

햇살이 불처럼 뜨거워

불열에 눈이 흐리어

 

보이지 않아도, 우리 굳이

해바라기 앞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해를 보고 살지니

 

벗아! 어서 나와

해바라기 꽃앞에 서라

 

 


 

 

윤곤강 시인 / 폐원(廢園)

 

 

머- ㄴ 생각의 무성한 잡초가

줄줄이 뻗어 엉클어지고 자빠지고

눈물 같은 흰꽃 한 송이 방긋 핀 사이로.

 

사-늘한 주검이 배암처럼 기어가다가

언뜻 마주친 때 임이 부르는 눈동자처럼

진주빛 오색 구름장이 돋아나는 것!

 

외로운 사람만이 안다

외로운 사람만이 알아......

슬픔의 빈터를 찾아

족제비처럼 숨이는 마음.

 

 


 

윤곤강(尹崑崗) 시인 / 1909~1949

충남 서산에서 출생. 보성 고보를 거쳐 연희 전문 학교에서 수학, 1934년경 경향파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퇴폐적 사조와 풍자적 경향의 시를 썼다. 광복 후에 그의 시는 많이 안정되어 고려 가요의 율조와 민족적 정서의 탐구로 발전하였다. 동인지 <시학>을 주재했으며, 보성 중학교 교사와 중앙 대학 교수, 성균관 대학 강사를 지냈다. 시집에 <대지> <만가> <피리> <동물 시집> 살어리>, 시론집에 <시와 진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