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직 시인 / 동양의 산
비쩍 마른 어깨가 항의하는 양 날카로운 것은 고발 않고는 못 참는 애달픈 천품을 타고난 까닭일게다. 격한 분화의 기억을 지녔다. 그 때는 어린 대로 심히 노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해마다 헛되이 뿌리를 박았으나 끝내 살림은 이루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처참함을 겪고나면 오히려 이렇게도 마음 고요해지는 것일까. 이제는 고집하여아 할 아무 주장도 없다.
지금 산기슭에 바주카포가 진동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낯설은 외국말로 함성을 올린다. 그리고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쉽게 쓰러져 죽은 선의의 사람들.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나의 이 고요함을 깨뜨릴 수 있으리오. 눈을 꼭 감은 채 나의 표정은 그대로 얼어 붙었나 보다. 미소마저 잊어버린 나는 동양의 산이다.
이한직 시인 / 풍장(風葬)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뜬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 이 되는구나.
날마다 날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이한직 시인 / 낙타(駱駝)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때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시인(詩人)은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문장>7호, 193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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