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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한직 시인 / 동양의 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2.

이한직 시인 / 동양의 산

 

 

비쩍 마른 어깨가

항의하는 양 날카로운 것은

고발 않고는 못 참는

애달픈 천품을 타고난 까닭일게다.

격한 분화의 기억을 지녔다.

그 때는 어린 대로 심히 노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해마다 헛되이 뿌리를 박았으나

끝내 살림은 이루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처참함을 겪고나면

오히려 이렇게도 마음 고요해지는 것일까.

이제는 고집하여아 할 아무 주장도 없다.

 

지금 산기슭에 바주카포가 진동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낯설은 외국말로 함성을 올린다.

그리고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쉽게

쓰러져 죽은 선의의 사람들.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나의 이 고요함을

깨뜨릴 수 있으리오.

눈을 꼭 감은 채

나의 표정은 그대로 얼어 붙었나 보다.

미소마저 잊어버린

나는 동양의 산이다.

 

 


 

 

이한직 시인 / 풍장(風葬)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뜬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 이 되는구나.

 

날마다 날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이한직 시인 / 낙타(駱駝)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때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시인(詩人)은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문장>7호, 1939. 8)

 

 


 

이한직(李漢稷) 시인 / 1921-1976

호는 목남. 1939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법학과에서 공부했다. 1943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잡지 〈전망 展望〉을 주재했고, 6·25전쟁 때는 공군소속 창공구락부로 종군했다. 1956년 조지훈과 함께 〈문학예술〉의 시 추천을 맡아보았고, 1957년 한국시인협회에도 관계했다. 1960년 공보실 문정관에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학 재학시절인 1939년 〈문장〉에 〈풍장 風葬〉·〈북극권 北極圈〉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온실〉(문장, 1939. 8)·〈낙타 駱駝〉(문장, 1939. 8)·〈동양의 산〉(시문학, 1951. 6)·〈여백에〉(문예, 1953. 9) 등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썼으나, 6·25전쟁 후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몇 편 썼다. 시집으로 〈청룡 靑龍〉(1953)이 있고 죽은 뒤에 〈이한직 시집〉(1977)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