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시인 / 거지의 꿈
헌 모자 헌 구두에 헌 양복 입고 다리 아래 졸고 있는 저 젊은 거지 왕이 될 꿈을 꾸나 장가갈 꿈꿔
아니네 아니네 왕도 장가 다 싫어 나팔 불고 북 치고 내다를 때에 앞장서서 만세 부를 그런 꿈꾸네.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고독
구(舊)길 삼거리의 황철나무 텅 빈 너른 벌판에 외로이 섰네, 한창 철은 저 모진 가지에 추천 매고 단오, 가위마다 마을각씨 한샹 뒤나 몰려와 재잘거리며 잘도 놀더러니 이제는 외짝재기 갓신이 석양나무 잎에 묻혀 갈 뿐, 한창 철 좋았음을 누가 있어 기억하리. 젊음이 가는 날 모두 다 이리 될 것을,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곡폐허(哭廢墟)
오호, 동경(東京)이여, 낙일(落日)에 외싸여 대지(大地)에 엎디어 우는 옛날의 도부(都府)여, 잿속에 파묻힌 찬연한 전당과 누대에 조사를 드리는 시민이여, 애닯아라 이 `문명의 몰락'을 바라보는 서러운 그 눈이여, 이제는 황금과 미인을 지키던 옛날의 기사는 창궁(槍弓)을 내던지고 폐허의 제단을 향하여 만가를 불러보나 아, 오동마차에 실리어 묘지로 향하는 `문명의 말로'여, 미와 부와에 결별치 않을 수 없던가, 오호, 동경이여,
아, 옛날의 동경이여! 대지에 우는 소리―연기, 화염, 피, 사람의 반역―그래서 굴종―발광―홍소―호읍, 아, 동경이여, 이렇게 처참하게 인류의 기억을 불살라버리는 이 날을 상상이나 하였던가. 역사 개조의 위대한 힘 앞에 우두두 떠는 가련한 이재의 시민을 그려나 보았던가. 아, 한 옛날의 영화에 고별하는 성채(城砦)여, 대자연의 세례(洗禮)에 오열하는 시민이여! 울기를 그치고 웃기도 그만두어라, 힘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그렇다 힘이다! 지나간 옛날을 탈환함에는 오직 커다란 힘이 있을 뿐이다. 아, 인류여, 여명 전에 선 저 동경의 비장한 울음 소리에 고요히 듣는 귀를 가져라.
국경의 밤, 한성도서, 1924
김동환 시인 / 구십춘광(九十春光)
봄날이 간다 못 견디게 가슴을 툭 치고 웃고 섰던 봄이, 음분(淫奔)한 탕녀같이 아니 갈 듯, 벌써 발을 돌려라 봄은 꽃살에 왔던가, 바람 끝에 앉았던가? 봄은 눈물에 젖었던가, 한숨에 피었던가?
웃으려던 이 마음은, 꾀꼬리 나타난 뒤 수양버들 가지같이 허공을 향하여 건네만 뛰노나.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귀도 없나, 입도 없나
천년 묵은 안압지에도 돌 던지니 출렁하고 대답 있데나, 겨우 열여덟, 이 기집애야 늬는 귀도 없나 입도 없나.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꿈을 따라갔더니
꿈을 따라갔더니 옛날의 터전이 보이고요, 호박넝쿨 거두던 따님도 보입데다. 꿈을 따라갔더니 어릴 때 놀던 금잔디벌이 놓이었구요, 도라지 캐러 다니던 마을 색시도요.
나는 어찌도 반가운지 꿈 같아서 휘파람으로 고요히 따님을 부르니 그는 호박넝쿨을 안고 달아나고요, 색시를 따르니 도라지괭이를 던지고 돌아섭데다.
아하 옛날은 가고요 꿈만 깃구요, 이 꿈조차 마저 간다면 나는 어쩌리.
국경의 밤, 한성도서,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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