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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해마다 봄이 되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8.

조병화 시인 /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름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 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조병화 시인 /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벼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조병화 시인 / 편지

 

 

달 없는 밤하늘은

온 별들의 장난이었습니다.

 

 


 

 

조병화 시인 / 파이프

 

 

파이프만 남았다.

모든 것이 내곁에서 떠나고

파이프만 남았다.

몸에 해롭다는 것만 남았다.

 

외로움도 몸에 해롭다는데

고독도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라는데

몸에 해롭다는 혼자만 남았다.

 

파이프만 남았다.

구멍이 펑 뚫린 까만 가슴만 남았다.

 

 


 

 

조병화 시인 /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