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시인 / 딸 삼형제
옛적에 이(李)정승이 딸 삼형제 뒀―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맏딸은 이쁜데 후원서 글 읽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둘째딸은 얌전한데 사랑서 명주 짜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셋째딸은 어진데 나무신 신고 물 긷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러다가 딸 셋이 모두 죽었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래서 맏딸은 초롱꽃 되고 둘째딸 셋째딸은 쌍나비 되어 초롱꽃 찾아간다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마음의 고향
내 사공이라면 아무도 안 가본 새 바다로 내 배를 몰겠고 내 소 치는 아이라면 아무도 안 가본 산골로 내 소를 이끌리라. 내 본디 성미 모든 것에 새것을 좋아하건만 그대만은 일생 두고 이대로, 옛 맘 옛 양자대로 꼭 지키고저.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면화밭
나는 좋더라 면화밭은 꽃이 피어 열매 맺고 열매 피어 꽃 되네 늙어도 청청한 소나무, 끊어도 되돌아 붙은 한강물 얘 셋째야 말 좀 해라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문
문이 좁아서 못 들어갑네다 문이 낮아서 못 들어갑네다 문에 맞춰 이 몸을 굽히고 깎기 싫어 저는 마지막 날까지 못 들어가는 몸이 되는가 보외다
이 몸이 세상에 맞춰 살아가기보다 세상을 이 몸에 맞춰 꾸며 볼까 생각하면서 오늘도 헛되이 살아갑네다 그러나 어느 날은 새 문턱에 내 발길 들여놓고야 말걸요
미발표(『돌아온 날개』), 1962
김동환 시인 / 물결
물결! 국토의 언덕을 스치며 지나는 바다 물결 빨간 등대불을 물고 뜯는 물결에도 밤바다 물결 때리며, 부수며, 노래 부르며 백사장에 달려드는 까만 밤바다 물결 몹시 초조하며 그리고 용감스러운 선구자처럼 블, 불길이 되어 아침에도 밤에도 효포(哮咆)하며 절벽에 달려드노나.
오, 파도여, 멀리 해심으로부터 둥실 둥실 떠 들어와 해안에 왓 하고 폭발되는 장렬한 밤바다 물결이여! 쥐 한 마리 잡는데도 전심력을 다하는 남양 토인(南洋土人)들과도 같이 죽기를 한하고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밤바다 물결 칼을 짚고 일어서는 무부(武夫)와도 같이 준마에 안장 놓는 기사와도 같이 한껏 거룩하여라.
오호, 물결이여, 등대불에 비치는 밤바다 물결이여 마지막 피를 토하고 간 정사자(情死者)의 모양같이 온몸이 불길이 되어 아침에도 밤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하소연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노나.
학은 수령(秀嶺)에 깃을 들이고 양은 깨끗한 종이에 입을 대인다고 아름답고 한숨 많은 이 땅을 스치며 지나는 어여쁜 밤바다 물결이여, 사랑하는 이 자태같이 귀엽기도 하노나!
오호, 강산의 굽이 굽이를 말갛게 닦는 밤바다 물결이여 백사장 위엔 외자국 길 낙인(落人)이 디디고 간 외자국 길 실비 드내리는 물가엔 임자 없는 외배 님이 마지막 버리고 간 외배 끌었다 안았다 일생을 헛장난으로 보내는 가엾은 물결이여!
그래도 울어라, 물결이여, 선풍(旋風) 만난 대해원(大海原)같이 울 대로, 끓을 대로, 힘껏 그래서 이 땅 위 백성의 식은 마음을 빨갛게 태워라 산 송장이 작열(灼熱)해 춤출 때 그로써 아름다운 아이 젖 빠는 소리 들리리
아, 밤마다 저녁마다 국토의 언덕을 스치며 지나는 밤바다 물결이여, 오뉴월 삼복에 마개 빼 논 맥주병같이 늘 끓어올라라, 기운 있게!
국경의 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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