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 / 초상
내가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러운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듯이 바다 기슭은 달음질쳐 갔읍니다
조병화 시인 / 존재, 그 순간
정적이라는 말이 있다 안개에 가물거리는 먼 그리움 떨어져 있는 혼자들을 말하는 거다
신비라는 말이 있다 잊었던 먼 사람이, 문득 눈 앞에 아롱거리는 걸 말하는 거다
하늘에, 산에, 골짜기에, 호수에 넘실거리는 이 아름다움 머지않아 내가 두고 가려니 아 사랑아, 그리움아
조병화 시인 / 재회
고황산(高凰山) 눈부신 꽃 속에서
세상을 먼저 떠난 벗들이 하나하나 일년 한 번 다시 돌아와 여기저기서 숨가쁘게 여보게 여보게 나를 부른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라일락 벚꽃들로 활짝 피어난 벗들의 얼굴 풍기는 하늘의 비누 냄새
어지러운 햇살 벗들의 인사 허, 늙었군 자네도 이젠 늙는군 늙을 줄을 아는군 늙어야지 홈싹 늙어야지, 홈싹 늙어야 다시 피어날 땐 이렇게 환하지
세상 근심할 거 없네 자네 어머님 말씀대로 잠깐일세
허나 가시지 않는 이 불안 살아 있기 때문에 지녀진 이 근심 인간이기 때문에 동행하는 이 고독
오, 꽃이여 저승에서 이승에로 일년 한 번 다시 돌아와 여기저기서 분주히 나를 찾는 벗들의 얼굴
여길세 여길세
꽃. 꽃. 꽃.
조병화 시인 /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마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마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래도 하냥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조병화 시인 / 있다는 거와 없다는 거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더욱이 죽어서 없다는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쉬운 일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있는 동안 당신을 볼 수 있어도
죽어서 어떻게 당신을 볼 수 있으리
이렇게 있다는 거와 없다는 거는 실로 엄청난 거리를 말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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