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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초상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9.

조병화 시인 / 초상

 

 

내가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러운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듯이 바다 기슭은 달음질쳐 갔읍니다

 

 


 

 

조병화 시인 / 존재, 그 순간

 

 

정적이라는 말이 있다

안개에 가물거리는 먼 그리움

떨어져 있는 혼자들을 말하는 거다

 

신비라는 말이 있다

잊었던 먼 사람이, 문득

눈 앞에 아롱거리는 걸 말하는 거다

 

하늘에, 산에, 골짜기에, 호수에

넘실거리는 이 아름다움

머지않아 내가 두고 가려니

아 사랑아, 그리움아

 

 


 

 

조병화 시인 / 재회

 

 

고황산(高凰山) 눈부신 꽃 속에서

 

세상을 먼저 떠난 벗들이

하나하나

일년 한 번 다시 돌아와

여기저기서 숨가쁘게

여보게

여보게

나를 부른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라일락

벚꽃들로

활짝 피어난 벗들의 얼굴

풍기는

하늘의 비누 냄새

 

어지러운 햇살

벗들의 인사

허, 늙었군

자네도 이젠 늙는군

늙을 줄을 아는군

늙어야지

홈싹 늙어야지, 홈싹 늙어야

다시 피어날 땐 이렇게 환하지

 

세상 근심할 거 없네

자네 어머님 말씀대로 잠깐일세

 

허나 가시지 않는 이 불안

살아 있기 때문에 지녀진 이 근심

인간이기 때문에 동행하는

이 고독

 

오, 꽃이여

저승에서 이승에로

일년 한 번 다시 돌아와

여기저기서

분주히 나를 찾는

벗들의 얼굴

 

여길세

여길세

 

꽃.

꽃.

꽃.

 

 


 

 

조병화 시인 /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마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마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래도 하냥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조병화 시인 / 있다는 거와 없다는 거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더욱이 죽어서 없다는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쉬운 일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있는 동안

당신을 볼 수 있어도

 

죽어서 어떻게

당신을 볼 수 있으리

 

이렇게 있다는 거와 없다는 거는

실로 엄청난 거리를 말하는 거다.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