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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종현 시인 /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8.

조종현 시인 /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워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는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亡靈)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젠가 한 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종현 시인 / 여인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꽃이 핀다.

 

그대의 파르한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조종현 시인 / 북관행(北關行)

 

 

1

안개비 시름업시 나리는 저녁답

기울은 울타리에 호박꽃이 떨어진다.

 

흙향기 풍기는 방에 정가로운 호롱불 가물거리고

젊은 나가니 나는 강냉이 국수를 마신다.

 

두메 산골이라 소치는 아이 풀피리 소리

베짜는 색시 고요히 웃는 양이 문틈으로 보인다.

 

2

강냉이 조팝에 감자를 먹으며

토방 마루에 삽살이와 함께 자고......

 

맑은 물 돌아가는곳

푸른 산이 열리놋다.

 

영(嶺)넘는 바윗길에 도라지꽃 홀로 피어

산길 칠십리를 뻐꾸기가 웃짖는다.

 

 


 

 

조종현 시인 / 芭草雨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조종현 시인 (趙宗玄, 1906년-1989년)

본명은 조용제(趙龍濟), 종현은 법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철운(鐵雲)·벽로(碧路)·예암산인(猊巖山人), 당호(堂號)는 여시산방(如是山房). 전라남도 고흥 출생. 13세 때 불문에 귀의하였으며, 1932년 중앙불교연구원(中央佛敎硏究院) 유식과(唯識科)를 졸업하고, 그 해 박성순(朴聖純)과 혼인하였다. 4남 4녀를 두었으며, 그 중 차남인 조정래(趙廷來)는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이다.

1930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60년 대한불교 법화종 이사, 1971년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拂入宗) 교정원장(敎政院長) 등 불교 관계 요직을 역임하였다. 교육계에도 종사하여 18년간 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