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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0.

조병화 시인 /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잎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조병화 시인 / 의자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읍니다.

 

 


 

 

조병화 시인 / 여인

 

 

그것은 움직이는 화산

밀폐한 우주

간단없이 흐르는 시내

 

그것은 가혹한 천국

허망한 수렁

개방된 하늘

 

그것은 미련의 종말

욕망의 흔적

비밀의 궁전

 

그것은 움직이는 영원

기름진 갈망

마르지 않는 신비

 

 


 

 

조병화 시인 / 소라의 초상화

 

 

당신네들이나

영악하게 잘 살으시지요

나야 나대로히

나의 생리에 맞는 의상을 찾았답니다.

 

 


 

 

조병화 시인 /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