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 / 병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조지훈 시인 / 꿈 이야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조지훈 시인 / 기다림
고운 임 먼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 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로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울리야...
어두운 밤 하늘에 고운 별아.
조지훈 시인 / 고풍 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조지훈 시인 / 고사(古寺) 1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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