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시인 / 봄놀이
칼로 썬 청포 두부에 컬컬히 뱉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서 태극선으로 땀을 들이면서 그 하루를 보내니 봄날은 어느새 꿈 속에 흐르더라.
대밭을 거닐며 왕참대 꺾어 구멍을 뚫어 피리를 부니 돌각담에 샛별이 앉은 것도 내 몰라라 봄날은 오는 듯 가는 듯 자취조차 아득하여라.
파―란 방축가에 누워 먼 하늘 끝 치어다보니 하늘도 봄빛 봄도 하늘빛 흰나비 드나드는 이 마음도 어느새 파란 봄빛에 젖더라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봄비
마른 산에 봄비 나리니 금시에 청산 되는 것을,
청산이 따로 있던가 비 맞아 숨살면 청산 되는 것을.
우리도 언제 저 청산같이 푸르청청하여 보나.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봄 소낙비
소낙비 올 제마다 늘 생각남은 비를 피해 들어선 느티나무 아래서 우연히 만났던 그애 생각,
성을 물어도 사는 동리 물어도 대답 없다가 열여덟이라 나만 일르고는 부끄러워 달아나 버리더니
다홍치마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세발 네발 노루같이 달아나 버리더니 올해도 그 나무 아래 혹시나 섰을까 열여덟이라면 벌써 시집갔을 나인데―.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봉과 닭
밤늦도록 토의 끝에 친구는 주먹을 쥐고 닭 천 마리에 봉 한 마리니 뭐 되랴 하기에 천 마리 봉 속에 닭 한 마리지 닭이란 그대와 나뿐이지 하였더니 그는 웃고 밤새도록 토의를 계속되나 알았는가, 그대와 나는 길 밑바닥에 깔리는 돌멩이로 지내세나
미발표(『돌아온 날개』), 1962
김동환 시인 / 부끄러움
앉을 자리 예비 없는 가난한 동리에 태어나 한여름 꿀벌인 듯 일생 두고 왕왕거리며 일해 왔건만 이제 또 뒷사람에 앉을 자리 마련 못한 채 가려 하니 부끄럼과 탄식으로 머리 둘 곳이 없네.
해당화, 삼천리사,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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