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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동환 시인 / 봄놀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0.

김동환 시인 / 봄놀이

 

 

칼로 썬 청포 두부에

컬컬히 뱉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서

태극선으로 땀을 들이면서 그 하루를 보내니

봄날은 어느새 꿈 속에 흐르더라.

 

대밭을 거닐며

왕참대 꺾어 구멍을 뚫어 피리를 부니

돌각담에 샛별이 앉은 것도 내 몰라라

봄날은 오는 듯 가는 듯 자취조차 아득하여라.

 

파―란 방축가에 누워

먼 하늘 끝 치어다보니 하늘도 봄빛 봄도 하늘빛

흰나비 드나드는 이 마음도

어느새 파란 봄빛에 젖더라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봄비

 

 

마른 산에 봄비 나리니

금시에 청산 되는 것을,

 

청산이 따로 있던가

비 맞아 숨살면 청산 되는 것을.

 

우리도 언제

저 청산같이 푸르청청하여 보나.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봄 소낙비

 

 

소낙비 올 제마다

늘 생각남은

비를 피해 들어선 느티나무 아래서

우연히 만났던 그애 생각,

 

성을 물어도 사는 동리 물어도

대답 없다가

열여덟이라 나만 일르고는

부끄러워 달아나 버리더니

 

다홍치마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세발 네발 노루같이 달아나 버리더니

올해도 그 나무 아래 혹시나 섰을까

열여덟이라면 벌써 시집갔을 나인데―.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봉과 닭

 

 

밤늦도록 토의 끝에 친구는 주먹을 쥐고

닭 천 마리에 봉 한 마리니 뭐 되랴 하기에

천 마리 봉 속에 닭 한 마리지

닭이란 그대와 나뿐이지

하였더니 그는 웃고 밤새도록 토의를 계속되나

알았는가, 그대와 나는 길 밑바닥에 깔리는 돌멩이로 지내세나

 

미발표(『돌아온 날개』), 1962

 

 


 

 

김동환 시인 / 부끄러움

 

 

앉을 자리 예비 없는 가난한 동리에 태어나

한여름 꿀벌인 듯 일생 두고 왕왕거리며 일해 왔건만

이제 또 뒷사람에 앉을 자리 마련 못한 채 가려 하니

부끄럼과 탄식으로 머리 둘 곳이 없네.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金東煥, 1901.9.21~?(납북)] 시인

1901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출생. 본관 강릉. 호 파인(巴人). 창씨명(創氏名)은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중동(中東)학교를 졸업.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과 수학.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금성(金星)》誌에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로 일컬어지는 대표작이며 동명 시집인 《국경의 밤》을 간행.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여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 근무.

1929년 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 발간.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등을 《삼천리》에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한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신. 1950년 6 ·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음. 저서로는 『승천(昇天)하는 청춘』,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李光洙 ·朱耀翰 공저), 『해당화』 등과 그외 다수의 소설 ·평론 ·수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