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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사랑하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1.

조병화 시인 / 사랑하면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한 인연이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서운해지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한 운명이라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 만큼 슬퍼지려니

이거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 더욱 못 견디게 그리워지면, 그것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뜨거운 눈물이려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흐느낌이 되려니

 

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이별이 그만큼 더욱더 애절하게 되려니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만큼

이멸이 더둑더 참혹하게 되려니

 

 


 

 

조병화 시인 / 사랑의 노숙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조병화 시인 / 사랑은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목숨

 

사랑은 닿지 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조병화 시인 / 사랑, 혹은 그리움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조병화 시인 / 사랑

 

 

사랑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거

 

한없이 그리워지는

그 그리움을 앓는 거

 

가까이 있어도, 살며시 손을 만져도.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