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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나의 육체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5.

조병화 시인 / 나의 육체는

 

 

나의 육체는

자학과 번뇌,고독이 긴 세월을 숨어서

부패 발효되어 스스로 짙게

가라앉아 고인

독한 맑은 술이옵니다.

 

짙은 독한 맑은 그 술이 긴 세월을 숨어서

스스로 증류되어 고인 맑은 눈물이옵니다.

 

스스로 취하는

 

 


 

 

조병화 시인 /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아가 제6장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린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 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조병화 시인 / 나는 긴 인생을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만난 것을 고마운 인연으로,

당신과 헤어져서 잊지 못하는 것을 사랑으로,

이렇게 오래 긴 세월을

하늘의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조병화 시인 / 꿈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랭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조병화 시인 / 길

 

 

산을 넘어도 산

고개를 넘어도 고개

개울을 넘어도 개울

길은 그저 묵묵히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사방 텅 비어 있는 우주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길은 그저 묵묵히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나선 마음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도

그저 길을 따라 가고픈 마음.

 

산을 넘어도 고개를 넘어도

개울을 넘어도 산을 넘어도

그저 묵묵한 길.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