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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동환 시인 / 재촉 편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4.

김동환 시인 / 재촉 편지

 

 

피었을 제 꽃이지 지면 티끌일 뿐

이 사람아 피었을 제, 젊었을 제

꽃이지, 지면 그뿐일 뿐.

다 지고 난 뒤 깨달으면 어쩌자는가

애달파라, 내 편지엔 오늘도 화답이 없네.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지열(地熱)

 

 

큰 바위도 지열이 쏘이면 엿물같이 녹아 흐르다가

그 열이 한번 멈추는 날 다시 식어 그만 용암 되어 우뚝 선다

이 나라의 거리 거리엔 모두 가다가 멈춘 바위뿐

아까운 영웅도 제사도 바위 되어 노변에 섰을 뿐

어느 제 님이 입김 다시 불어 이 용암을 녹여 흘리려는고.

 

미발표(『돌아온 날개』), 1962

 

 


 

 

김동환 시인 / 첫날밤

 

 

자, 가자, 어서, 어서, 신부의 방으로

부끄러워 병풍 뒤에 숨죽이고 있는

나의 한낫 보금자리에 이 몸을 잊고자.

 

촛불 그림자 두려움에 떠는 그를 비춘다,

두 나래 활 버린 청춘이 방안에 와 앉는다

내일 아침 밝기 전 이 몸 어찌될 것 생각 말고 어서 가자.

 

자, 가자 어서, 어서 신부의 방으로

내가 조선에 바칠 오직 한낫 선물이 기다리고 있잖느냐

이 몸이 로서아로 간 뒤 뒤를 이을 한 개의 빨간 생명이.

 

오호, 신부는 병풍 뒤서 거룩한 일에 떨고 있다

하늘이 나를 시켜 전하는 보물 어서 님께 드리자

그래 어서 가자, 가자, 신부의 방으로!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초인의 선언

 

 

소리개거든 그저 쏘아라, 하늘에 뜬―

어쩌면 맞을까고 망설이지 말고 먼저 쏘아라.

 

풀밭에 떨어졌거든

어디를 맞았는가 살피기 전에

먼저 숨이 끊어졌는가 보아라!

 

국경의 밤, 한성도서, 1924

 

 


 

 

김동환 시인 / 파업

 

 

펜을 던졌다

아침부터 동무하던 펜을 던졌다

그리고 의논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길까고

주먹은 탁자를 부쉈다. 격정은 불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여럿은 유태교인이 되자고

`눈은 눈으로 이빨은 이빨로!' 하는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金東煥, 1901.9.21~?(납북)] 시인

1901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출생. 본관 강릉. 호 파인(巴人). 창씨명(創氏名)은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중동(中東)학교를 졸업.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과 수학.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금성(金星)》誌에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로 일컬어지는 대표작이며 동명 시집인 《국경의 밤》을 간행.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여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 근무.

1929년 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 발간.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등을 《삼천리》에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한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신. 1950년 6 ·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음. 저서로는 『승천(昇天)하는 청춘』,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李光洙 ·朱耀翰 공저), 『해당화』 등과 그외 다수의 소설 ·평론 ·수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