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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남남 27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4.

조병화 시인 / 남남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에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에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턴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동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조병화 시인 / 남남 22

 

 

네 파란 들이 되고 싶어라

알알이 꿈을 밴 말들이

멋대로 꽃을 피워

파란 하늘이 물결치는

빛의 바람의, 들이 되고 싶어라

인간의 괴로움, 슬픔은 도시에

인간의 외로움은

군중 속에

그리하여

인간의 일체의 욕망에서 훨 훨

벗어나

풀과 꽃의 사랑이 되어

망설이는 네 길이 되고 싶어라

때를 꽃피우는 들이 되고 싶어라

그리하여 마지막 내 그 밤은

널 위하여 비는

온 하늘

네 별밭이 되고 싶어라.

 

 


 

 

조병화 시인 / 난

 

 

스스로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려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찿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입히고

그 생명을 늘려

환한 그 내일을 열어가리.

 

 


 

 

조병화 시인 /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조병화 시인 / 낙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