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 / 남남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에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에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턴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동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조병화 시인 / 남남 22
네 파란 들이 되고 싶어라 알알이 꿈을 밴 말들이 멋대로 꽃을 피워 파란 하늘이 물결치는 빛의 바람의, 들이 되고 싶어라 인간의 괴로움, 슬픔은 도시에 인간의 외로움은 군중 속에 그리하여 인간의 일체의 욕망에서 훨 훨 벗어나 풀과 꽃의 사랑이 되어 망설이는 네 길이 되고 싶어라 때를 꽃피우는 들이 되고 싶어라 그리하여 마지막 내 그 밤은 널 위하여 비는 온 하늘 네 별밭이 되고 싶어라.
조병화 시인 / 난
스스로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려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찿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입히고 그 생명을 늘려 환한 그 내일을 열어가리.
조병화 시인 /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조병화 시인 / 낙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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