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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늘, 혹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3.

조병화 시인 / 늘, 혹은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조병화 시인 / 넌

 

 

넌 그 자리에서 좋은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거다

지금 이곳이세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릿곳에서

먼 그자리에서 좋은거다.

 

 


 

 

조병화 시인 / 너와 나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야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조병화 시인 / 내가 시를 쓰는 건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조병화 시인 / 낮과 밤

 

 

너를 보았기 때문에

너를 보았기 때문에

너를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열매를 먹은 것처럼

열매를 먹은 것처럼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