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한용운 시인 / 사랑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4.

한용운 시인 / 사랑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 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한용운 시인 / 비밀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겄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용운 시인 / 밤은 고요하고

 

 

밤은 고요하고 방은 물로 시친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옆에 놓아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않습니다그려.

 

 


 

 

한용운 시인 / 당신이 아니더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이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괴롭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나 나는 늙지 아니 할테야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테야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서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한용운 시인 / 님의 얼굴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자연은 어찌하여 그렇게 어여쁜 님을 인간으로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가 없읍니다.

알겠습니다. 자연의 가운데에는 님의 짝이 될 만한 무엇이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입술같은 연꽃이 어디 있어요.

님의 살빛 같은 백옥이 어디 있어요.

봄 호수에서 님의 눈결 같은 잔물결을 보았습니까.

아침볕에서 님의 미소 같은 방향을 들었습니까.

천국의 음악은 님의 노래의 반향입니다.

아름다운 별들은 님의 눈빛의 화현입니다.

 

아아, 나의 님은 그림자여요.

님은 님의 그림자밖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8.29 ~ 1944.6.29] 시인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18년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구제를 노래했음.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피검되어 3년간의 옥고 치름.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으며, 1944년 입적.

조선의 불교계 및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되고 1967년 탑골 공원에 용운당만해대선사비가 건립됨.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 외에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정선강의채근담』 등이 있으며 사후에『한용운전집』, 『한용운시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