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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한용운 시인 / 남아(南兒)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5.

한용운 시인 / 남아(南兒)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한용운 시인 /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당신의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한용운 시인 / 꿈과 근심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고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겄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한용운 시인 /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한용운 시인 / 자유정조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보다도 사랑입니다.

 

남들은 나더러 시대에 뒤진 낡은 여성이라고 삐죽거립니다. 구구한 정조를 지킨다고.

그러나 나는 시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과 정조의 심각한 비탄을 하여 보기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유연애의 神聖(?)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大自然을 따라서 超然生活을 할 생각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究竟, 만사가 다 저의 좋아하는 대로 말한 것이요, 행한 것입니다.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

나의 정조는 "自由貞操"입니다.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8.29 ~ 1944.6.29] 시인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18년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구제를 노래했음.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피검되어 3년간의 옥고 치름.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으며, 1944년 입적.

조선의 불교계 및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되고 1967년 탑골 공원에 용운당만해대선사비가 건립됨.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 외에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정선강의채근담』 등이 있으며 사후에『한용운전집』, 『한용운시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