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밤길
바람 눈보라가 친다 앞 길 먼 산 하늘에 아무것도 안보이는 밤.
아 몹시 춥다.
개 한 마리 안짖고 등불도 꺼지고 가슴 속 숲이 호올로 흐득이는 소리 도깨비라도 만나고 싶다 죽는 게 살기보다도 쉬웁다면 누구가 벗도 없는 깊은 밤을.......
참말 그대들은 얼마나 갔는가.
발자국을 눈이 덮는다 소리를 하면서 말 소리를 들 제도 자꾸만 바람이 분다. 오 밤길을 걷는 마음.
임화 시인 / 9월 12일 -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임화 시인 / 자고새면
자고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주검에서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진 장미넝쿨 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하기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 임화 전집(풀빛,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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