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별 밭에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 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기슭.
별 밭에선 지금 한창 영겁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 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星苑, 1962
신동엽 시인 /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원제 :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來日)은 이길 것이다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신동엽 시인 / 봄의 소식(消息)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上陸)해서
동백(冬柏)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惡漢)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自殺)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창작과비평, 1970. 봄
신동엽 시인 / 불바다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신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신동엽 시인 /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波濤)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으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待合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江)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抗拒)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威嚴)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안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生)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人類)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精神)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歷史)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自覺)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 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昇華)된 높은 의지(意志)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아사녀, 문학사, 1963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화 시인 /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외 2편 (0) | 2019.09.03 |
---|---|
변영로 시인 / 버러지도 싫다하올 외 2편 (0) | 2019.09.02 |
임화 시인 / 지상의 시 외 2편 (0) | 2019.09.02 |
변영로 시인 / 님아 외 3편 (0) | 2019.09.01 |
신동엽 시인 / 단풍아 산천 외 4편 (0) | 201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