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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변영로 시인 / 버러지도 싫다하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

변영로 시인 / 버러지도 싫다하올

 

 

일(一)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 몸이

불연듯 그대 생각 어인일가

그리운 마음 자랑스럽습내다

 

촛불 밝고 마음 어둔 이 밤에

당신 어대 계신지 알 길 없어

답답함에 이내 가슴 터집내다

 

이(二)

 

철안나 복스럽던 옛날엔

그대와 나 한동산에 놀았지요

그 때는 꽃빛도 더 짙었습내다

 

어젠가 우리 둘이 강가에 놀 때

날으던 것은 흰 새였건만은

모래 위 그림자는 붉었습니다

 

바로 그 때 난 데 없는 바람 일어

그대와 나의 어린 눈 흐리워져

얼껼에 서로 손목 쥐었습내다

 

삼(三)

 

그러나 바람이 우리를 시기하였든가

바람은 나누어 불지 아니하였스련만

찢기는 옷같이 우리는 갈렸습니다

 

이제것도 그리움이 눈 흐리울 때

길에서 그대 비슷한 이 보건만은

아니실 줄 알고 눈감고 곁길로 가옵내다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벗들이여

 

 

구름인 다음에야,

설마 하늘보다 더 오래가랴―

벗들이여, 여기엔 `믿음' 뿐.

 

오랜 구름 그릇같이 깨어지고,

푸른 하늘 눈 [眼]같이 트이니―

벗들이여, 여기엔 `바람[希望]' 뿐.

 

하늘빛 이 몸에 배이고

먼 곳이 손에 잡힐 듯하니―

벗들이여, 여기엔 `기쁨' 뿐.

 

얼비춰 빛보았는지,

기빨이 나부끼니―

벗들이여, 여기엔 `모임' 뿐.

 

부실한 귀 헛들었는지,

어디선지 나팔 소리 나니―

벗들이여, 여기엔 `나감' 뿐.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봄비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우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치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불키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을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卞榮魯, 1897.5.9 ~ 1961.3.14] 시인

1898년 서울에서 출생. 아호는 수주(樹州). 시인이며 수필가와 ·영문학자로 활동. 시집으로 『조선의 마음』,『수주 시문선』, 영시집『진달래 동산』이 있음. 이화여전·성균관대 교,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초대 회장, 동아일보 기자·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역임. 서울시 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