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사랑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북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처럼 깡똥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 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신동엽 시인 / 사랑의 고정
사랑의 고정(苦情)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답니까? 말슴 마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도 겉으로 웃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랍니다.
천지신명이 대자연에 밝으니 나는 아무델 가나 알머리처럼 따가워라.
너의 방에선 너의 보금자리 남새가 난다.
자신(自信)이 흔들리는 지라 자꾸 역확인(逆確認)을 얻으려고
<자신 있느니라고> 강조해 보는 것이리라.
석(石)을 두고의 순수한 상모(想慕)가 아니다. 어느 누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빌미로써의 석(石). 또는 그것에 반동적으로 대립하기 위한 방패로써의 석(石).
신동엽 시인 / 살덩이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오,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창작과비평, 1970년 봄호, 1970
신동엽 시인 / 삼월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앞 걸어가는 행렬(行列)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槍)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현대문학, 1965. 5
신동엽 시인 / 새로 열리는 땅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넘으면 정전지구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 거니노라면 초연 걷힌 밭 두덕 가 새벽 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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