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해 시인 / 굴뚝
멀리 정신병동 굴뚝에서 한 줄의 희디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켜진 창문이 양귀비꽃처럼 환하다 그 속에서 구부러진 꽃술처럼 서성거리는 사람들 밤이면 각양각색의 소리로 울부짖어도 온갖 뒤범벅된 사연들이 총천연색이어도 그것들을 뒤섞어 끓여내는 굴뚝에는 언제나 명쾌한 단 한 줄의 대답이 꽂혀있다
저 토끼털처럼 유순하고 새하얀 연기 속에는 어떤 극명함도 치열함도 숨겨져 있지 않다
밤하늘 속으로 자꾸만 흰 동물들을 빚어내는 저 굴뚝도 결국은 무뚝뚝한 병동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던 것
아무리 소리 지르고 발광하여도 열리지 않는 창살처럼 굴뚝은 언제나 뭉게뭉게 희디흰 안녕 만을 전하고 있다
시집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2007) 중에서
문성해 시인 / 외곽의 힘 2
도시의 외곽으로 화훼단지가 펼쳐져 있다 견고한 비닐 하우스 아방궁 속에서 천적도 없이 비대해진 꽃들이 사철 피어 있는 그곳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외곽에서 총이나 대포가 아닌 꽃들이 쳐들어온다는 것, 트럭을 타고 꿀과 향기로 중무장한 그들이 아침마다 톨게이트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는 것은,
꽃집마다 비장하게 피어 있는 저 프리지아들 그 빛깔과 향기가 필사적이란 것을 가까이 사는 벌 나비들은 안다
매연 속에서 암 수술을 꼿꼿이 세워 꽃잎 펼치고 있는 것이 치열한 전투가 아님 쓰레기 더미에 저리도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진 꽃들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매일 수만 톤의 꽃들이 도시에서 학살되어도 내일이면 또 수많은 꽃들이 태어나는 외곽, 꽃들은 아직 젊고 혈기왕성하다
도시를 삥 둘러싸고 핵 실험실이 아닌 꽃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희망적이다
그들은 매일 핵폭발 하듯 꽃을 피운다
시집 『자라』(창작과비평, 200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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